•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2.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 2) 국내 무산계급 운동의 성장
  • (3) 오르그뷰로와 ‘13인회’

(3) 오르그뷰로와 ‘13인회’

 1923년 1∼6월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서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과 1923년 8월 보이찐스키의<민족적 당창건 지침>등은 상해파와 노선대립을 일으키고 마침내 1923년 12월 상해파의 지도자 이동휘는 꼬르뷰로를 탈퇴하게 되었다.128) 전명혁, 앞의 글, 54∼59쪽.

 이후 1924년 2월 코민테른집행위원회는 조선문제에 대한 위원회를 소집하는데 여기에서 보이찐스키와 쿠시넨의 견해 차이가 발생하였다. 보이찐스키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은 근로대중을 노동조합·농민조합에 끌어들여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민족주의적 단체에서 활동하도록 하고 이를 꼬르뷰로의 강령에 기초하여 통합하도록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쿠시넨은 공산주의자를 민족적 단체에 포함하여 하나의 당에 통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 독자적인 공산당의 존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29) 강호출,<재노령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오르그뷰로) 연구>(≪역사와 현실≫28, 1998), 130∼131쪽.

 이와 같이 코민테른집행위원회 내부에서 조선공산당 창건에 대한 입장 차이가 존재하였다. 보이찐스키와 쿠시넨의 견해 차이는 식민지 조선의 혁명운동을 위한 조선공산당과 반제통일전선체의 결성과 두 조직의 관계를 둘러싼 코민테른 내부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단지 조선문제에만 국한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국공합작을 둘러싼 중국공산당과 코민테른 내부의 대립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1922∼1923년 무렵 중국에서 國共合作을 둘러싸고 코민테른 내부와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이견이 발생하였다. 코민테른의 마링은 국민당은 부르주아정당이 아니라 모든 계급이 연합한 당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민당에 들어가 그것을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변모시킬 것을 주장한 반면, 진독수 등은 국민당은 부르주아 정당의 하나일 뿐이며 공산당이 가입하여 부르주아와 뒤섞이면 당의 독립성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1923년 6월 중국공산당 3차당대회는 마침내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과 공산당원이 개인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할 것을 결정했다.130) 벤자민 I. 슈워츠, 권영빈 역,≪중국공산주의운동사≫(형성사, 1983), 65쪽.
向靑, 임상범 역,≪코민테른과 중국혁명관계사≫(고려원, 1992), 49∼57쪽.

 조선혁명에 대한 보이찐스키와 쿠시넨의 의견 대립은 1924년 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산하 원동부가 제안한<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제안)으로 일단락되었다. 1924년 2월<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에서는 정치적·조직적으로 독립된 공산당의 창립과 발전을 지시하고 대중조직, 즉 기업과 공장 등 현장에 기반한 당조직의 강화를 강조하였다. 또 당의 중앙집행부 구성에 대한 구체적 방침을 제시하고 이러한 방침에 기초하여 조선의 공산당을 결성하기 위해 1924년 4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코민테른집행위원회 대표의 참석하에서 당창립대회(inaugural congress;konstituierenden Kongress)를 개최할 필요성을 제안했다.131)<Korean Question>, 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115, 72∼81쪽.
<Koreanische Frage>, 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115, 82∼93쪽.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제안)은 1923년 1∼6월 상해에서 열렸던 국민대표회에서 꼬르뷰로가 민족주의 그룹 가운데 한 그룹132) 민족주의 그룹 가운데 한 그룹은 문창범 등의 노령 대한국민의회로 추정된다.과 관계를 맺었고 이것은 조선공산주의자 사이에 반대를 야기하였다는 사실과 꼬르뷰로가 민족운동의 ‘좌익적’ 요소와 협동을 하려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공산당 형성의 긴급성을 소홀히 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133)<Korean Question>, 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115, 72쪽. 또한 상해파의 지도자 이동휘가 코민테른에 보낸 편지를 인용하면서 이동휘의 입장을 올바른 노선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1923년 12월 꼬르뷰로에서 탈퇴한 이동휘는 조선공산당의 존재가 ‘조선의 혁명운동에서 중요한 주체적 요인을 형성할 것’을 강조하였다.134)<Korean Question>, 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115, 75쪽. 또 원동부는 이 ‘결정’에서 블라디보스톡의 꼬르뷰로가 해산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135)<Korean Question>, 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115, 81쪽.

 이후 코민테른집행위원회는 1924년 4월 꼬르뷰로를 해체하고136) СИНЧЕР и КИМЕНУ, ИСПОЛКОМУ КОМИНТЕРНА, 1926. 2. 11(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125), 신철·김영우,<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게:까.엔.당(북풍회 내부의 비합법적 그루빠 대표의 보고>, 1926년 2월 11일, 85쪽. 金哲勳·朴應七·南萬春·田友·張道政·李衡根·이젤손 등은 1924년 4월 15일 블라디보스톡에서 고려공산당 책임자회의를 개최하고 5월 7일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이하 ‘준비위’)를 개최하였다.137) 고려공산당 책임자회의에 참석했던 김철훈·박응칠·남만춘·장도정·이형근 등은 1923년 초 블라디보스톡에 설치되었던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위원회 내의 고려부 위원이었다. 이들은 기관지≪선봉≫을 발행하며 연해주의 조선인혁명가들을 결집하여 활동하였다. 이젤손(Идельсон;그동안 인데르손으로 알려졌다)은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산하 원동부의 조선문제 책임자였다. 그는 보이찐스키 후임으로 블라디보스톡의 ‘원동부’에 부임하였다. ‘준비위’의 창립, 이것이 오르그뷰로의 창립이었다. 그러나 오르그뷰로는 아직 코민테른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고 국내의 대표들도 참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설치되었다.

 <鄭在達·李載馥調書>에서 이재복(李成)은 오르그뷰로의 노령대표로 이형근·남만춘, 지나(중국)대표로 박응칠·김철훈, 국내 대표로 김철훈·신백우·이봉수 등이 지명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 중 국내 대표 김약수·신백우·이봉수 등 3인은 불참하였다.138)<鄭在達·李載馥調書>(金俊燁·金昌順 編,≪韓國共産主義運動史(資料篇 I)≫, 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79), 122쪽.

 鄭在達(전우)과 이재복은 다시 준비위원에 참여하여 주로 국내에 여러 차례 파견되어, 국내 사정을 블라디보스톡의 오르그뷰로에 보고하는 주로 실무적인 사업에 배치되었다. 1924년 6월 6일 ‘준비위’ 10차회의는 정재달이 출발 한지 1·2주일 후에 그의 사업에 협조하기 위해 이재복을 재차 국내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고 “전우 동무와 같이 각 공산단체를 연합하는데에 노력”하라는 내용의<지령서>와 이재복을 고려공산당 창당준비위원회의 대표로서 국내에 파견하여 국내공산단체를 단합하여 고려공산당 창립대표회를 소집할 것을 위임하는<위임장>을 주었다.139)<지령서>·<위임장>(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94, 1924. 6. 6), 126쪽.

 ‘준비위’는 정재달을 파견하기에 앞서 이미≪先鋒≫의 주필인 이백초를 파견하여 국내 정세를 파악하였다. 1924년 6월 12일 ‘준비위’ 11차회의록에는 이백초의 보고내용이 수록되어 있다.140) 위와 같음. 이에 따르면 이백초는 3월 26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4월 26일 경성에 도착하여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동향을 파악하였다. 그는 1개월 동안 서울에 있으면서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13인회’(국내 ‘조직국’)를 조직하여 이미 4차례의 회의를 개최하고 노농총동맹과 청년총동맹 등 대중조직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13인회’는 공산단체 각파의 연합적 사업에는 아직 착수치 못하였고, 그 이유는 꼬르뷰로 국내부 지령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또한 국내부 성원들은 “사업진행을 정지하고 그 위원들은 13인 단체에 가입하였다. 13인 단체가 사업에 착수치 아니한 중요(한) … (이유)는 상부기관의 승인을 부득함이라 한다. 동 단체는 계파의 수령들로 조직된 고로 각파에서는 절대 복종한다. 김사국 일파들은 적극적으로 일하지는 않으나 방해할 위험은 결코 없다”141) 위와 같음.고 보고했다.

 이백초의 국내에 대한 정세보고를 청취한 뒤, ‘준비위’는 ‘13인회’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실현하였고 각 공산단체와의 연합에도 크게 노력할 것이므로 정재달을 파견하여 ‘13인회’와 연합하여 당창건 준비사업을 진행하라는 결정을 내렸다.142) 고려공산당창립대회위 준비위원회(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94, 1924. 6. 6).

 ‘준비위’의 결정에 따라 정재달은 1924년 6월 15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24일 아침 서울에 도착하고, 이재복은 7월 9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23일 경 서울에 도착했다.143)<鄭在達·李載馥調書>(金俊燁·金昌順 編,≪韓國共産主義運動史(資料篇 I)≫, 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79), 216쪽. 그들은 각각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국내 여러 분파의 사회주의자들을 만나 블라디보스톡의 오르그뷰로의 당창건 계획을 설명하고 특히 김약수·이봉수·신백우 등과 만나 오르그뷰로의 국내대표로 참석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1924년 9월 일제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오르그뷰로는 국내 ‘조직국’(‘13인회’)과 연합을 하여 통일적인 당창건사업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국내 ‘조직국’ 즉 ‘13인회’와 통일적 당창건사업을 협의하지 않았다. ‘13인회’는 서울파 5인(김사국·이영·정백·김유인·이혁로)과 화요파 2인(신백우·김재봉), 북풍파 3인(김약수·김종범·변희용), 상해파 2인(유진희·이봉수), 조선노동당(김연희) 등 5개 분파의 13인의 대표자로 구성되었다.144) КимЕнман·Цойцаник, Исполкому Комунистического Интернационала, 1926. 2, 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125(김영만·최창익,<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게:서울청년회 내부에 현존하는 공산주의조직 ‘고려공산동맹’ 전권대표로부터>, 1926년 2월), 103쪽. ‘13인회’는 이와 같이 국내외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주의 분파를 망라하여 단일한 통일적 조선공산당 창립을 목표로 조직되었다.145) КимЕнман·Цойцаник, 위의 글, 104쪽.

 그런데 이재복과 정재달이 ‘13인회’ 즉 국내 당창건을 위한 조직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블라디보스톡의 오르그뷰로의 지시에 기초하여 화요파의 조선공산당 창립 가능성을 약속하고, 또 화요파는 국내 조직국(‘13인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적인 당창건 활동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내 조직국은 1924년 9월 5개월만에 결렬되고 말았다.146) КимЕнман·Цойцаник, 위의 글, 105∼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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