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2.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 3) 조선공산당의 창건
  • (3) ‘1·2차 조선공산당사건’과 조선공산당 2차당대회

(3) ‘1·2차 조선공산당사건’과 조선공산당 2차당대회

 1925년 11월 22일 조선공산당은 ‘신의주사건’(‘제1차조선공산당사건’)으로 당 중앙집행위원회의 대부분을 포함하여 약 30여 명의 지도부가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신의주의 한 식당에서 신만청년회 회원이면서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던 김경서 등이 친일변호사를 구타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고려공산청년회 대표인 박헌영이 조봉암에게 보내는 비밀문서가 드러나면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고 일제의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은 체포되기 직전인 1925년 12월 15일 중앙집행위원 김찬·주종건 등과 강달영을 임시 책임비서로 이준태·김철수·이봉수·홍남표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하는 당조직의 재편을 단행하였다.199) 김준엽·김창순,≪한국공산주의운동사≫2 (청계연구소, 1986), 377∼385쪽.

 한편 화요파 조선공산당은 1925년 말부터 1926년 5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서울파 고려공산동맹과 당통합 논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통합 원칙의 차이와 서울파의 지도자인 김사국의 죽음, 그리고 코민테른이<1926년 3월 결정>을 통해서 화요파 조선공산당을 정식 코민테른의 지부로서 승인하자 화요파 조선공산당은 통합논의를 중단해버렸다. 이에 서울파 등 국내 사회주의 분파들은 결국 통일적 당건설에 대한 견해를 철회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부딛치게 되었다.200) 전명혁, 앞의 글(1998), 162∼168쪽.

 1926년 6·10 만세투쟁으로 인한 화요파 조선공산당에 대한 또 한 차례의 검거(‘2차조선공산당사건’)는 화요파에 대한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純宗의 장례식을 계기로 민중봉기를 계획하였다. 당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권오설의 주도하에 조선공산당은 ‘6·10투쟁특별위원회’를 두고<檄告文>201) 대한독립당의 이름으로 배포된 이<격고문>은 “현재 세계정세는 식민지 민중 대 제국주의 군벌의 투쟁과 무산자계급 대 자본가계급의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계급에 대한 무산자 계급의 투쟁은 계급적 경제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있어서는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군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2차조선공산당검거보고철>, 김준엽·김창순 편,≪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II)≫,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9, 58∼59쪽).·<服喪 慟哭하는 민중에게 檄함!>등의 전단을 배포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은 100여 명의 당원이 체포되었다. 1·2차 조선공산당 사건은 사실상 화요파 조선공산당의 와해를 가져왔다.

 이 무렵 북경의 혁명사 출신의 梁明 등은 ‘분열된 운동선의 통일’을 위해 레닌주의동맹을 조직하고 서울파의 李廷允·李仁秀·李載夏 등이 참가하고 1926년 8월 동경 一月會 계열의 安光泉·河弼源 등이 가입하면서 ‘ML파’라는 새로운 사회주의 분파가 형성되었다.

 1926년 9월 2일 ‘상해파’ 출신 김철수는 오희선·원우관 등과 회합하여 당집행부서를 재정비하였다. 서울파 고려공산동맹은 조선공산당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에 심각한 대립을 일으키고 마침내 화요파로의 통합을 반대하는 세력과 조선공산당에 가입하는 세력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화요파를 대체하는 세력이 서울파가 아니라 ML파로 대체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조선공산당 임시책임비서 김철수는 11월 28일 중앙위원회를 열었다. 중앙위원회에는 禹丹宇(吳羲善)·安光泉·權泰錫·金俊淵·梁明 등이 참여하였다. 중앙위원회는 1926년 12월 6일 당대회를 소집할 것과 대회에 출석할 대의원을 정하였다. 참여대의원은 당원분포 비례 및 기타 사정에 의하여 경기도 1인, 충청남북도 1인, 전라북도 1인, 전라남도 1인, 경상북도 1인, 경상남도 1인, 황해도 1인, 평안북도 1인, 평안남도 1인, 함경북도 1인, 함경남도 및 강원도 1인, 일본대표 1인, 고려공청 대표 1인 등 총계 13인으로 정하였다.

 중앙위원회는 강령 및 규약의 확정 및 당면한 의안은 금번 대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기 곤란하므로 그것은 다음해(1927) 2월 8일 임시대회를 소집하여 결정하기로 하고 이번 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해 놓고 모든 운동방침을 승인받기로 하였다.202)<朝鮮共産黨第二會定期大會 會議錄(1926년 12월 6일)>(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터, Ф.495 Оп.135 д.123), 72쪽.

 마침내 1926년 12월 6일 조선공산당 2차당대회가 개최되었다. 2차당대회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의 개회사로 시작하였다. 김철수는 파괴된 조직 및 질서를 근본적으로 정돈하고 확립하기 위하여 11월 16일 고려공산동맹을 가입시켜 당세의 확장이 이루어졌다는 것과 본대회의 대의원수가 너무 소수이지만 이 대의원들은 각 지방의 주요한 당원인 것과 더욱이 지금까지 분립되어 있던 운동이 통일되어 회집된 것으로 보아 조선혁명운동사상 가장 위대한 힘이 뭉친 모임이라고 말했다.203)<朝鮮共産黨第二會定期大會 會議錄(1926년 12월 6일)>(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터, Ф.495 Оп.135 д.123), 50쪽.

 대회는 대의원심사를 위해 심사위원 3인을 추천하여 鄭學先·하필원·姜錫奉을 선출하였다. 심사위원은 다음의 13인을 대의원으로 선출하였다. 대의원 13인 가운데 강석봉·장준·이인수는 서울파 고려공산동맹의 조직원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경남 盧百容, 전남 姜錫奉, 경북 鄭學先, 전북 林赫根, 충남북 張埈, 경기 河弼源 황해 李仁秀, 평남 安昌濤, 평북 朴殷爀, 함북 金永燮, 강원 徐載國, 동경 朴洛鍾, 高共靑 대표 金剛(<朝鮮共産黨第二會定期大會 會議錄(1926년 12월 6일)>, 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터, Ф.495 Оп.135 д.123, 51쪽).

 대회는 먼저<민족운동에 관한 방침>을 통해 ‘민족주의자의 정당을 형성’할 것을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방침을 정하였다.

㉮모든 정치적 운동을 단일기관으로 결과시킬 일. ㉯정당조직을 개인단위로 하고 지부제를 채용할 일. ㉰만일 兩翼으로 분리하고 말거든 양편에 각각 프락치를 두되 그 중에 가장 우세이고 또 활동이 가능한 자에 주력을 쓸 일. ㉱타락적 민족주의자(일본정부의 주구 및 그것에 유사한 자)에 대하여는 그 심사와 술책을 민중 앞에 폭로하여 구축을 기할 일(<朝鮮共産黨第二會定期大會 會議錄(1926년 12월 6일)>, 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터, Ф.495 Оп.135 д.123, 57쪽).

 2차당대회에서 채택한 “민족주의자의 정당을 형성”한다는 결정은 1927년 2월 신간회의 결성으로 구체화된다. 대회는 또한 노농총동맹을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맹할 것과 노동쟁의 및 소작쟁의에 대한 구체적 전술을 세울 것을 결정하였다. 대회는 서울파의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일시적 회합에 그치게 할 일”과 “정치운동 시인의 선언을 발표케 할 일”, “지방노농협의기관을 발달시킬 일”, “각 운동에 대한 논강을 제정케 할 일” 등을 결정하였다.

 또한 대회는 “정우회와 전진회를 위시하여 재래의 모든 사상단체를 해체할 일, 그리하여 전위분자로 하여금 전국적 단일 표면적 정당에 가입케 하여 당의 직접 지도하에서 활동케 할 일”과 서울파의 “사회주의동맹에서 소집하게 된 사상(총)동맹은 성립치 못하게 할 일” 등을 결정했다.204)<朝鮮共産黨第二會定期大會 會議錄(1926년 12월 6일)>(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터, Ф.495 Оп.135 д.123), 58∼61쪽.

 대회는 정학선·강석봉·하필원 3인을 중앙집행위원 및 중앙검사위원 전형을 위한 선거위원회로 하여 안광천·韓偉建·金俊淵·정학선·權泰錫·金南洙·하필원 등 7인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후보위원에 金泳植·安相吉·金世淵·양명·강석봉·張赤波(張日煥)·李丙儀 7인을 선출하였다. 또 중앙검사위원에는 金炳璹·盧百容·林宗桓(林豹) 3인과 후보위원으로 朴泰善·朴洛鍾 2인을 선출했다.205)<朝鮮共産黨第二會定期大會 會議錄(1926년 12월 6일)>(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터, Ф.495 Оп.135 д.123), 79쪽.

 한편 대회 하루 전인 12월 5일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양명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였다.206)<朝鮮共産黨第二會定期大會 會議錄(1926년 12월 6일)>(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터, Ф.495 Оп.135 д.123), 64쪽.

正委員:河弼源·宋彦弼·高準·林炯日·金哲·趙杞勝·溫樂中 候補委員:金伊龍·金在明·都寬浩·李基錫·姜宇·金鎬般·韓林

 김철수 책임비서 시기 共靑책임비서인 양명은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를 맞아 일월회 출신의 하필원을 책임비서로 하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부서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1926년 12월 6일 조선공산당 2차당대회는 일월회 출신의 당책임비서인 안광천과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하필원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1926년 12월 6일 조선공산당 2차당 대회는 사실상 서울파의 전위조직인 고려공산동맹의 해체를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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