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2.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 3) 조선공산당의 창건
  • (4) 조선공산당 3차당대회와 정치노선

(4) 조선공산당 3차당대회와 정치노선

 1928년 2월 2일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에서 검거를 피한 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1928년 2월 27∼28일 조선공산당의 마지막 당대회였던 3차당대회를 열었다. 당대회에는 전형위원으로 이경호·정백·이정윤을 선정했다. 이들은 노동자출신 車今奉을 책임비서·안광천·양명·한명찬·김재명·윤일·김한경·윤일·이성태 등으로 중앙집행위원을 구성했다. 그리고 안광천을 정치부장, 김한경을 조직부장으로 선출했다. 차금봉은 노동자 출신으로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때부터 노동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대회는 규약을 개정하고<코민테른 결정서>를 토의했다.<코민테른 결정서>는 1928년 1월 상해국제위원회으로부터 이정윤이 받은 것으로 파벌청산, 당을 노동자 출신으로 강화할 것, 공장·광산·철도 등에 당세포를 조직할 것, 산별노조의 조직, 신간회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소로서 형성할 것 등을 지시했다. 조선공산당은<결정서>가운데 ‘파벌청산문제’에 대해서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거부하고 “조선에서의 파쟁은 1927년 상반기 이후는 완전히 소멸되어 현재의 소당파는 전혀 비공산주의단체이므로 평화수단에 의한 해결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수정하여 가결했다.

 대회는 코민테른에 보내는 보고서인<국내정세에 관한 보고서>(<논강>)를 토의하고 승인했다.<보고서>는 29개항으로 구성되어 당시 조선의 정세분석과 혁명의 성격, 투쟁슬로건 등을 담고 있는 강령적 성격을 띠고 있다.<보고서> 7항의 “조선의 노농계급은 기억해야 한다. … 중국혁명은 위대한 교훈이고, 국민당은 그 좋은 예이다. 곧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는 매우 신뢰하기 어려운 동맹자이며 그들은 혁명운동의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이를 배반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의 광범한 집단이 이 운동에 참가하고 사실상 혁명적 전술이 성립한 그때의 일이다”라는 부분은 1927년 장개석의 4·12 쿠테타로 인한 코민테른의 민족부르주아지, 즉 국민당에 대한 입장의 변화를 당시 조선공산당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1928년 3월 조선공산당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조선민족해방운동에 관한 테제>(<정치논강>)를 채택하였다. 이 테제는 안광천이 기초한 것으로 당시 조선의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통일전선의 위상에 대한 당시 서울파의 이항발의 견해를 ‘좌익소아병적 견해’로 권태석과 장일성(신일용)의 견해를 ‘청산주의적 견해’로 비판하고 있다. 이 테제에서는 “조선의 장래 권력형태는 조선사회의 정세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이어야 한다. 조선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좌익소아병적 견해이고 부르주아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우경적 견해”라고 하면서 “조선의 장래 권력조직은 조선사회의 실정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에 있어야 한다”고 ‘인민공화국’을 권력형태로 상정하고 있다. 이는 2월의 당대회에서 채택한<보고서>의 9항에서 “현재 광범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앞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민적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투쟁은 노농대중의 민주주의적 집권자를 갖는 인민공화국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혁명적)인민공화국’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적 내용을 갖는 것일까. 조선공산당의<보고서>10항에는 “조직적 국민회의는 보통선거권 위에 소집되어야 한다. 각도에서도 각각의 방법으로 도인민회의가 선출되어야 한다. 각 촌에서는 농민 및 소작인으로 이루어진 농민소비에트가 선출되어야 한다”는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연구자마다 상이한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우동수는 이 내용을 “보통선거에 기초한 대표기관과 생산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소비에트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국가”인 혁명적 인민공화국으로 파악한다. 그는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참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 농촌소비에트를 통해 그들을 견제하고자 한 것으로, 이 방침은 부르주아지·소부르주아지 상층을 민족해방운동 속으로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위한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고 “결국 조선공산당이 상정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은 노농소비에트국가를 현단계에서 건설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는 인식하에서 노농소비에트국가의 전단계로 설정된 과도적 중간정부”였다고 해석한다.207) 우동수,<1920년대말∼30년대 한국사회주의자들의 신국가건설론>(≪한국사연구≫72, 1991), 106쪽.

 임경석은 우동수의 견해는 1935년 코민테른 7차대회 이후 제기된 ‘인민공화국’ 슬로건에 대한 설명으로는 타당하지만 당시 정황으로는 설득력이 없다고 하면서 당시 조공은 “민주주의 혁명강령에 입각해 있었고 4대계급의 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전술을 취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통일전선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직접적 전취를 주장한 점 등을 고려할 때”, 혁명적 인민공화국이란 “노농민주독재의 국가형태로서 제시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조공의 이와 같은 ‘통일전선정권론’이 1928년<12월테제>이후 3계급동맹에 기초한 ‘소비에트슬로건’으로 변화했고 이것은 “종전의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사실상 폐기하고 민족주의 고립화론을 채택케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208) 임경석,<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의 국가건설론>(≪大東文化硏究≫27, 1992), 217∼219쪽.

 김승은<정치논강>을 기초한 안광천은 코민테른 제8차 확대집행위의<중국문제에 관한 결의>(1927년 5월 30일)에 의거하여 ‘혁명적인민공화국’을 중국의 무한정부와 같은 권력형태로 상정했다고 한다. 그는<중국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무한정부를 소비에트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일반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하는 과도단계의 권력형태로 파악”하였고, 따라서 “‘혁명적인민공화국’ 역시 노농소비에트로 이행하기 위한 전단계의 전술적 권력형태였다”고 파악하고 있다.209) 김 승,<신간회 위상을 둘러싼 ‘양당론’·‘청산론’ 논쟁연구>(≪釜大史學≫17, 1993), 558쪽.

 또한 서중석은 인민공화국의 성격을 “보통선거에 의해 국민회의-도인민회의-농민소비에트의 실현을 주장한 것으로 보아 중앙정부형태는 부르주아민주공화국에 가깝고, 지방정권은 인민위원회 또는 소비에트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한다.210) 서중석,<해방후 주요정치세력의 국가건설방안>(≪大東文化硏究≫27, 1992), 234∼235쪽.

 이와 같이 인민공화국의 정치적 내용에 대한 여러 연구자들의 분석은 상이하지만 각각의 연구는 ‘사실’에 대한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질 수가 있다.

 먼저 우동수와 김승이 노농소비에트의 과도단계로서 상정하고 있는 ‘중간정부’와 ‘전술적 권력형태’는 부르주아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 전화한다는 2단계혁명론에서 말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과정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소비에트정부의 수립과 시민적 부르주아정부의 수립을 각각 좌·우편향으로 비판하면서 조공이 권력형태로 제기한 인민공화국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부르주아권력의 중간적 형태로서 ‘노농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를 상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혁명의 과정은 중간적 과정, 즉 제3의 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부르주아독재인가, 프롤레타리아독재인가 하는 두 가지 길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노농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라는 슬로건은 화합될 수 없는 두 가지 길을 절충하려고 했던 시도였다. 당시<정치논강>의 내용을 볼 때 조공은 결국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1단계)의 과정을 거친 후에 사회주의혁명(2단계)으로 순차적으로 발전한다는 단계적 과정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2단계혁명론은 당시 코민테른과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철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기본적인 과제, 조공의 슬로건에서도 제기되어 있는 토지혁명을 비롯한 노동자와 농민의 기본적 권리보장 등의 해결은 그것의 완수와 동시에 연속적인 혁명의 과정을 수반하게 된다. 또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적 과제의 완성은 사회주의혁명의 과정 속에서 완수될 수 있는 것이었다.

 노동계급이 농민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하면 그 권력은 부르주아혁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는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대립되는 민주주의독재의 이론은 결국 정치에 환상과 허구를 끌어들이고 동양의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장악투쟁을 마비시키며 식민지 혁명의 승리를 속박하게 되는 것이다. 1925∼1927년 중국혁명의 과정은 이러한 과정을 비극적으로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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