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2.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 4) 조선공산당의 해체와 당재건운동
  • (1) 조선공산당의 해체와<12월테제>·<9월테제>

(1) 조선공산당의 해체와<12월테제>·<9월테제>

 조선공산당은 1928년 7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일제의 검거로 책임비서 차금봉이 구속되는 등 조직이 와해되었고 코민테른의<12월테제>의 지침에 따라 노동자와 빈농에 기초한 당 재건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는 코민테른의 제1∼7차 대회에 참가한 조선인 사회주의자와 그들의 조직을 분석하고, 각 시기 조선의 혁명노선과 코민테른의 관련을 분석하면서<12월테제>채택 이전인 1928년 11월 경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조선공산당조직문제에 대한결정>(이하<결정>으로 줄임)에서 이미 6차대회의 코민테른 지부승인을 취소하는 결정이 내려졌다고 언급한다.211) 水野直樹,<코민테른과 조선-각 대회의 조선대표의 검토를 중심으로>(≪조선민족운동사연구≫1, 1984).
임영태 편,≪식민지시대 한국사회와 운동≫(사계절, 1985), 338쪽.
코민테른의<결정>에 대해 무라다(村田)는 “이 결정은 때때로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한 문서처럼 해석되어 왔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제6회 대회가 명시적으로 조선공산당을 지부로서 승인하고 있는 것으로도 명확하다. 서로 싸우는 분파의 누구도 당의 대표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서술하여 당의 통일의 조급한 실현을 요구한 것에 다름아니다”212) 村田陽一 편,≪코민테른자료집≫4(대월서점, 1981), 608쪽.라고 코민테른의 입장을 변호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인덕은<결정>에서 “조선의 어느 공산주의자 그룹도 국제당 지부로 승인 할 수 없다”는 내용은 분명히 “조공을 해산시킨 지부승인 취소의 내용이었다”라고 평가한다. 그는 이어서 코민테른의<12월테제>는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파벌적 요소의 잔존, 조직구성에서 지식계급·학생중심의 편향, 주의자의 조직활동의 불철저성을 지적한 점에서 올바르지만 당시 조선의 정세에 부합하지 않는 편향을 범했다고 평가하고 있다.213) 김인덕,<조선공산당의 투쟁과 해산>(≪일제하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1991), 79∼81쪽.

 이균영은<코민테른 강령>과 코민테른 6차대회에서 쿠시넨이 기초한<식민지·반식민지국가의 혁명운동에 관한 테제>·<12월테제>·<9월테제>등을 분석하면서 “1926년 4월 코민테른 간부회의에서 점정적으로 가입을 승인받았던 조공은 제6회 대회에서 정식 코민테른 지부로 승인되었”고,<결정> 역시 조공의 승인취소를 결정한 문서는 아니었다고 해석한다. 또한 그는<12월테제>는 “조공의 승인을 취소하거나 해체를 지시한 것이 아니라 … (이를) 전제로 한 조공의 재건지침이었다”고 말한다.214) 이균영,<코민테른 제6회대회와 식민지 조선의 민족문제>(≪역사와 현실≫7, 1992), 312∼314쪽.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에서 결의한<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12월테제>)는 코민테른 6차대회의<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에서의 혁명운동에 대하여>(<쿠시넨테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첫째 조선혁명은 “종래의 자본주의적 존속을 파괴하고 토지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고 자본주의적 압박으로부터 토지를 해방하는”, 즉 제국주의의 타도와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주내용으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했다. 둘째 혁명의 동력은 선도적 역할을 증대시킬 노동자계급, 특히 공장노동자·곤궁한 농민(농업노동자)·도시 소부르주아지이고 부르주아지는 기껏해야 민족개량주의적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대지주들은 일제와 완전히 결합하기에 이르렀다. 셋째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하에서 제국주의의 탄압을 이겨냄으로써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 노농민주독재의 수립(소비에트의 형식), 나아가 부르주아지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하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2단계 혁명론이라고 밝히고 있다. 넷째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방침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운동을 강화하여 부르주아지의 민족혁명운동에 대해서는 그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한편, 민족혁명운동에 계급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민족 혁명운동을 강화해야 하는, 즉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운동으로부터 이러한 운동의 동요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폭로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코민테른의<12월테제>는 결국 파벌싸움을 이유로 조선공산당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노동자·농민에 기초한 당의 재건을 지령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요구는 프로핀테른(Profintern)의<9월테제>(<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 프로핀테른 산하 범태평양노동조합의<10월서신>(<조선의 범태평양 노동조합 비서부 지지자에 대한 동비서부의 서신>) 등 국제 혁명지도기관에 의해 노선적으로 뒷받침되고 고무되었다.

 1930년 9월 18일 프로핀테른(적색노조인터) 집행사무국에서 채택한<9월테제>는 원산총파업 이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격화되고 있지만 조선노동총동맹은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목적의식적으로 올바르게 지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주요 이유는 조선노동총동맹이 개량적 지도부에 의해서 지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독자적인 혁명적 노동조합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등이었다. 그러므로 프로핀테른 지지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고한 혁명적 당이 부재하고 그에 준하는 ‘좌익조직’이 전혀 없는 조건에서 기존의 노동조합 내부에 좌익을 집결시켜 그 주도권을 장악하여 산업별 혁명적 노동조합으로 개편하고, 노동조합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운 혁명적 노동조합을 산업별 조직 원칙에 입각하여 건설해야 한다는 것 등을 지적했다.

 <9월테제>의 주요내용은 첫째 “조선에서의 혁명적 노동운동을 강화할 것과 그것을 위해서는 민족개량주의와의 투쟁이 불가피하다”라는 것을 채택하여 조선의 공산주의자에게 제시했다. 둘째<12월테제>의 기본방침(조공재건)을 기본적으로 따르면서 1929년 세계대공황이 일본의 경제에 미친 영향과 그에 따라 새롭게 변화된 조선의 노동자·농민과의 관계를 고려한 위에서 조선 노농운동의 당면 임무를 제시했다. 셋째 일제와의 민족해방투쟁을 통해 혁명적 노농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조공을 새롭게 건설할 것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총 8개조 17개 항목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 조직’으로 간주한 부분이었다. 코민테른은 신간회에 대해 언급하면서 당시 조선의 민족개량주의적 부르주아지는 일제의 자치제 약속에 매수되어 “조선혁명의 방파제 역할을 하며≪동아일보≫·≪조선일보≫와 천도교 및 신간회는 학생들의 동맹휴학 및 노동자의 시위운동에 사보타지 정책을 펴는” ‘민족개량주의 단체’라고 규정하였다.

 <12월테제>는 명시적으로 조공의 해체를 지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코민테른이 제시한 노동자·농민에 기초한 당재건의 과제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과도한 요구였다. 따라서 많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실질적인 조공의 해체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에 따라 1930년 3월에 조공의 만주총국이, 31년 10월에 일본총국이 각각 해체되었다.

 <12월테제>의 내용해석은 코민테른 6차대회의 전체적 기조, 즉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테제라는 낙관적 정세론과 사민주의를 사회파시스트로 규정하는 당시 스탈린주의화된 코민테른에 대한 정확한 이해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코민테른은 1928년<12월테제>에서 조선공산당의 파벌문제와 소부르주아 지식인 중심의 당 등의 이유로 실질적인 해체지시와 다름없는 노동자·농민에 기초한 새로운 당건설 방침을 지시하였다.

 당시 조공사건으로 체포된 당원들의 직업별 구성을 보면 소부르주아(지식인·학생·상인 등)의 비율이 42.4%, 농민이 13%, 노동자 11.6%, 무직 29% 기타 4% 등으로 노동자계급의 비율이 매우 열악함을 알 수 있다. 혁명정당은 노동자계급의 당이므로 구성원 대다수가 노동자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계급에 뿌리내리는 걸음을 시작한 조선공산당에게 이러한 요구는 과도했다.

 또한 당내의 파벌문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불균등하게 발전하는 현실 속에서 획일적인 당을 기대하는 것은 변화하는 현실을 기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12월테제>가 발표된 이후 조선공산당은 해체되고 ‘대중 속으로’·‘인민 속으로’라는 슬로건 속에서 당재건운동에 주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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