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1. 6·10만세운동
  • 1) 융희황제의 승하와 6·10만세운동의 태동

1) 융희황제의 승하와 6·10만세운동의 태동

 1926년 4월 25일 융희황제가 승하하자 望哭과 奉悼를 통한 애도분위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여기에 宋學先의 金虎門의거, 그리고 국외 독립군의 심상치 않은 동향들로222) 융희황제 國喪 동안인 1926년 5월 경 국내의 각 신문들에서는 正義府·新民府 등 만주독립군 단체가 국내로 진입할 것이라는 기사를 여러 차례 내보내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민족적 항일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금호문의거는 융희황제의 승하로 전국에 망곡이 물결치던 때인 4월 28일 오후 1시 10분 경 금호문 앞에서 송학선이란 청년이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의거를 단행한 것이었다. 평소 安重根 의사를 흠모하였던223)宋相燾,≪騎麗隨筆≫(국사편찬위원회, 1971), 374∼377쪽. 그가 안중근 의사를 흠모한 것은 1923년 경 우연히 日本人 商店에 걸려진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고서였다. 이때 송학선은 伊藤博文을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들에게 까지 존경받는 것을 목격하고 조선총독 齋藤實을 처단하기로 결심을 굳혀 갔다고 한다. 시골청년 송학선은 수년 전부터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뜻을 세워오다가, 융희황제 승하소식을 접하고 조선총독 사이토의 처단을 결행하기로 결심하였다. 4월 28일 조문을 위해 사이토 총독이 온다는 정보를 접한 송학선은 금호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京城府協議會 의원 사토(佐藤虎次郞)를 사이토로 잘못 알고 의거를 결행하였다. 당초 목표인 사이토 총독 처단에는 빗나갔지만, 망국의 통한에 젖어 있던 한국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통쾌한 쾌거였다. 평범한 농촌청년인 그가 그것도 단독으로 결행한 의거라는 점에서 충격과 감동은 배가되어 갔다. 그가 “나는 主義者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여 마땅하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겠다”고224)≪동아일보≫, 1926년 5월 23일. 한 법정진술은 당시 식민지 통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융희황제 승하 직후 결행된 송학선의 의거는 항일적 분위기를 고조시켜 갔고, 3·1운동 때와 같은 기운이 재연될 조짐이 일고 있었다.

 일제는 3·1운동 때와 같은 분위기가 다시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망곡과 奉悼式을 철저하게 규제하며 官의 주도 아래 거행하는 것을 기본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때문에 망곡과 봉도를 강행하는 일반 민중 및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일제와의 충돌은 불가피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4월 25일부터 5월 2일까지 8일 동안에 일제 경찰에 주의·설유·검속당한 사람이 3만 명에 달하였다는225)≪조선일보≫, 1926년 5월 5일. 사실은 그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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