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1. 6·10만세운동
  • 2) 해외의 6·10만세운동 계획과 추진

2) 해외의 6·10만세운동 계획과 추진

 6·10만세운동의 계획은 上海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먼저 추진되었다. 임시상해부는 당초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에 즈음하여 대규모의 대중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국내 대중단체의 대표격인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1924년에 창립된 이후 집회금지를 당하였다가 1926년에 이르러 집회가 제한적이나마 허용되면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들 단체는 간담회 형식이나 대의원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메이데이기념식 행사를 준비해 갔다. 그리하여 4월 24일에는 정우회·전진회·조선노농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의 4단체 합동으로 메이데이기념식을 거행하기로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개최되는 것이었지만, 임시상해부와 조선공산당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시위투쟁을 전개하고자 한 것이었다.

 임시상해부의 金丹冶는 중국 안동현과 국내로 파견되어 대중시위 계획을 추진해 갔다. 4월 23일부터 4월 29일까지226)이때 김단야는 金恒俊과 이봉수 등을 만나서 운동자금을 건네주었다(<제2차조선공산당검거보고철>, 金俊葉·金昌順 編,≪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2,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80, 109쪽). 신의주에 잠입하여 국내 거사를 준비하던 중 김단야는 융희황제의 승하소식을 접하였고, 애도의 분위기가 전국으로 물결쳐 가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가 융희황제의 승하로 인하여 메이데이기념행사를 원천봉쇄함에 따라, 메이데이기념일의 대중시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단야 등은 당초의 대중시위 계획을 만세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해 갔다. 즉 처음에는 계급적 반제시위로 추진되던 메이데이기념시위가 4월 25일 융희황제 승하와 함께 급변하는 상황에서, 보다 민족적 운동의 형태인 만세운동쪽으로 방향을 조정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227) 시위형태에서 독립만세운동의 특징은 ‘절대 독립’을 뚜렷이 표방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립만세운동은 시위의 강도를 떠나 정치적 운동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식민지통치를 전면 부정하는 강력한 저항의 방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이들은 융희황제의 國葬을 사회주의운동이 대중으로 확산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민족운동의 선봉’에 선다는 비난이 있더라도 만세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6·10만세운동의 계획과 더불어 제반의 준비도 추진되어 갔다. 임시상해부는 만세운동에 필요한 자금과 격문의 인쇄를 담당키로 하였다. 이에 따라 김단야는 상해로 돌아와 曺奉岩·金燦 등과 함께<服喪 慟哭하는 民衆에 檄함>이란 격문을 작성한 뒤 崔昌植이 경영하는 上海 삼일인쇄소에서 5,000장 정도를 인쇄하여 서울로 보냈다.228) 당시의 상황에 대해 김찬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李王逝去와 國葬은 민중운동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지령을 발하고 운동자금은 후일 보내기로 하였는데 성명은 잊었으나 모학생에게 천백여 원을 탁송하였다. 또<望哭하는 民衆에게 檄함>이라는 제목의 격문 수천 장을 상해 3·1인쇄소 崔昌植 방에서 김단야의 원고에 기초하여 인쇄하고, 기타 격문의 원고와 함께 권오설에게 보냈다”(<金洛俊調書>, 金俊葉·金昌順 編,≪韓國共産主義運動史≫ 자료편1,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80), 405∼406쪽). 이 격문은 안동에 5월 28일 경 도착되었고, 예정대로 三成運送店에서 서울로 부쳐졌다.229)<2차조선공산당예심결정서>(김영진,≪朝鮮共産黨事件眞相≫), 33∼34쪽. 이때 운송의 책임을 맡았던 金恒俊은 격문을 낡은 상자에 싸서 서울로 보낸 뒤 6월 3일에 서울에와 貨物引換證을≪조선일보≫의 홍덕유에게 건네주었고, 홍덕유는 다시 권오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서울역에 도착된 격문은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의 계획이 발각되는 것과 함께 국내의 인사들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압수되고 말았다.230)≪동아일보≫, 1926년 6월 8일.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선언서의 인쇄가 임시의정원 의장 최창식이 경영하던 삼일인쇄소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삼일인쇄소는 임시정부의 기관지≪獨立新聞≫을 발행하던 곳이기도 했다. 삼일인쇄소의 최창식과 임시상해부의 여운형·김단야 등은 긴밀한 관계를 이루는 사이였다. 이 무렵 임시정부가 최창식 대행체제로 운영되고 있던 점을 감안할 때, 6·10만세운동의 계획은 임시정부 인사들과도 연대를 이루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가 융희황제의 因山에 맞추어 국내 의거를 계획·추진해 갔던 것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1926년 1월 상해에서 결성된 병인의용대는 임시정부 경무국장 羅昌憲 등의 주도로 일제 기관의 파괴·일제 밀정 및 주구배 처단 등을 주요 활동 지침으로 삼아 의열투쟁을 전개했으며, 국내 및 만주의 독립군단체와도 연계하면서 국내에서의 의거를 도모하고 있었다.231) 1926년 5월 경 나창헌·이유필 등이 간도지역에서 파견된 독립군 요원 10여 명과 상해에서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음이 일제 정보망에 포착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병인의용대가 만주 독립군과도 연계되어 투쟁 계획을 세워 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朝鮮總督府 警務局,≪上海情報≫1926년 5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이하 ‘아연’)자료 문서번호 33, 213쪽). 병인의용대가 국내에서의 의열투쟁을 계획한 것은 융희황제 승하 직후인 4월 말부터였다. 이들은 5월 9일 최고간부회의를 통해 융희황제 국장을 기해 거사를 단행하기로 최종 결의하였다. 국내의 천도교와 연결된232)장석흥,<6·10만세운동과 통일전선운동>(≪국사관논총≫90, 국사편찬위원회, 2000), 309쪽. 이들의 목표는 총독과 같은 일본 대관의 처단이었다.233) 朝鮮總督府 警務局,≪上海情報≫1926년 5월 20일(고대 아연자료 문서번호 33), 256∼257쪽. 그리하여 金光善(金光孫)·李英全(李德三)·高俊澤·金碩龍 등 대원 4명이 국내로 잠입하기 위해 6월 1일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권총 2정과 폭탄 2개, 다수의 격문을 휴대하고 중국 상선 순천호에 승선했다가, 황포탄 하류에서 일제의 수상경찰에 잡혀 거사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23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7(1973), 610∼612쪽.
≪동아일보≫, 1926년 6월 4·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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