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1. 6·10만세운동
  • 3)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

3) 국내의 6·10만세운동 추진과 발각

 6·10만세운동은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학생층 등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다른 정치이념을 초월하여 깊은 연대 아래 계획·추진되었던 점에서 독립운동상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민족독립을 위해 3·1운동이 종교이념을 초월하였다면, 정치이념을 초월한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중반 통일전선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계획 초기부터 천도교를 가장 유력한 제휴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투쟁지도부는 6·10만세운동의 거사를 위해 처음부터 천도교 세력과 연대를 모색해 갔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와의 연결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權五卨과 朴來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에서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지원하는 전술을 취하였다. 3·1운동을 주도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은 바 있는 천도교는 일제의 분열책으로 창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신·구파의 내부분화로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같은 처지에서 구파의 인사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하게 될 경우 또 다시 옥고를 치를 것은 뻔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구파세력은 붕괴되고 말 형편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들 지도자들은 일선에 나서지 않은 채 배후에서 청년세력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이 사실은 절대 비밀리에 붙여졌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공산당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조선공산당이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중심으로 진행시켜 갔던 것은 조직보전을 위한 방책으로 취해진 것이었다. 1925년 11월에 1차조선공산당이 발각되어 크게 타격을 입은 조선공산당은 겨우 당의 진용을 수습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에서는 당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세시위의 추진을 당 중앙기관과 분리된 형식으로 취하기로 결정하는235) 조두원,<6·10운동과 조선공산당>(≪청년해방일보≫, 1946년 6월 9일). 등 당의 보전책을 강구하였던 것이다. 권오설의 주장에 따라 ‘6·10투쟁특별위원회’라는 별도의 투쟁지도부를 결성한 것은 그같은 뜻에서였다.236) 全錫淡,<六十運動小史>(≪週報 民主主義≫22, 1947년 7월), 11쪽. 이것은 공식 명칭은 아니었고 잠정적인 것이었다. 6·10만세운동의 투쟁지도부는 러시아의 10월혁명이 3인의 지도위원회에서 추진되었던 것과 같이 권오설의237) 권오설은 1897년 경북 안동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漢文私塾에서 한문을 익혔고, 11세 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대구고보와 1918년에 중앙고보를 다녔지만 경제사정으로 학교를 마치지는 못하였다. 이후 그는 전라남도 도청에 잠시 근무했지만, 3·1운동으로 퇴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고향에서 佳谷農民組合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안동청년회와 풍산소작인조합·풍산청년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그는 李準泰와 동지적 관계를 맺게되면서 사회주의사상에 접근해 갔다. 그리고 1924년 풍산소작인회 대표의 자격으로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에 참석 후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사상단체 火曜會에 가입하였으며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차조선공산당 발각 후 그는 2차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활동하다가 6·10만세운동으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에 의해 1930년 4월 17일에 옥중 순국했다(權大雄,<權五卨의 生涯와 活動>,≪安東文化硏究≫6, 1992). 책임하에 李智鐸·박민영 3인으로 구성하였다.238) 조두원,<6·10운동과 조선공산당>(≪청년해방일보≫, 1946년 6월 9일). 이들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와 간부들이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6·10만세운동의 투쟁지도부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주도해 간 것이었다.

 이때 지도부는 세 가지의 투쟁방침을 결정했다. 첫째는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의 혁명분자를 망라하여 ‘大韓獨立黨’을 조직할 것, 둘째는 대한독립당은 우선 6월 10일을 기하여 대시위운동을 실행할 것, 셋째는 시위운동의 방법은 장례행렬이 지나는 연도에 시위대를 분산 배치하였다가 격고문 및 전단을 살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 등이었다.239) 강덕상 편,≪現代史資料≫29(1976), 425쪽. 이에 따라 6·10만세운동의 주체들은 혁명세력의 결집에 힘을 기울여 나갔고, 그 가운데 천도교 구파는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6·10만세운동에서 천도교측의 주요 임무는 격문 인쇄 및 배포와 지방 조직의 활용을 통한 지방만세운동의 확산에 있었다.240)<박래원신문조서(1회, 1926. 10. 14)>(고려대 아연 소장자료, 문서번호 100호), 325∼328쪽.
<권오설신문조서(3회, 1926. 10. 11)>(고려대 아연 소장자료, 문서번호 100호), 141∼145쪽. 이때 박래원은 권오설로부터 600원의 자금을 받았다.
비록 천도교 구파의 세력이 신파에 비해 열세였고, 또 천도교청년동맹이 생긴 지 얼마 안됐다고는 하나 천도교의 조직기반은 전국적이었으며 세력규모도 민족세력 중에서는 여전히 유력한 것이었다.241) 박래원은 당시 천도교가 동원시킬 수 있는 군중의 수가 20만 정도였다고 회고하였다(≪조선인민보≫, 1926년 6월 10일,<박래원의 증언>). 그러나 이것은 조금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조사 기록에는 구파의 세력이 1만도 채 안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래원은 천도교청년동맹과 인쇄직공조합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동지규합에 나서 손재기·백명천·양재식·민창식·이용재 등을 포섭할 수 있었다. 그리고 권오설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인쇄에 필요한 소형 인쇄기 2대와 용지 20장, 활자, 기타 필수품을 구입하였다. 이들이 인쇄에 착수한 것은 5월 15일경 권오설에게서 격고문과 전단의 원고를 받은 후인 5월 17·18일부터였다.242)<박래원 신문조서(1회)>(고려대 아연 소장자료, 문서번호 100호), 325∼326쪽. 처음에 이들은 안국동 36번지 백명천의 집을 거점으로 삼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격문을 인쇄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웃에서 위조지폐를 제조한다는 소문이 돌자 5월 27일 경에 인쇄기를 몰래 민창식의 집으로 옮겨 5월 31일까지 약 5만 장의 격문 인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쇄가 완료된 격문은 비밀을 보존하기 위해 석유상자 등에 나누어 넣은 뒤 경운동 88번지 천도교당 안에 있는 손재기의 집에 숨겨 두었다.

 박래원과 관계자들은 격문의 지방배포와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세워놓고 있었다. 우선 격문은 지방의 조선일보지사·개벽지사·소비자조합·천도교 교구·기타 청년단체 등에 보내기로 하고 발송 지역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243)<박래원 신문조서(1회)>(고려대 아연 소장자료, 문서번호 100호), 340∼343쪽.
박래원,<6·10만세운동 회상>(≪신인간≫통권 337호, 1976), 15쪽. 이들 두 기록은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양쪽에서 지명되고 있는 지역은 모두 표시했다.
<박래원 신문조서(1회)>(고려대 아연 소장자료, 문서번호 100호), 347∼348쪽에 기록된 지역은 박래원과 권오설이 함께 지정한 것이다.

전라남도(광주·목포·순천·광양), 전라북도(전주·군산·정읍·남원), 충청남도(공주·대전·예산·홍성·천안), 충청북도(청주·충주·음성), 경상남도(진주·마산·부산·하동·고성), 경상북도(대구·안동·상주·영천·포항), 경기도(인천·개성·강화·의정부·수원), 황해도(황주·해주·사리원·재령·신천), 평안남도(평양·진남포·안주), 평안북도(신의주·선천·철산·정주), 함경남도(함흥·정평·홍원·영흥·원산·북청), 함경북도(청진·나남·온성·웅기)

 격문의 송달 방법은≪開闢≫·≪新民≫·≪新女性≫등의 잡지 사이에 넣어 발송할 계획이었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추동하기 위해 책임자를 선정하여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을 호남선·경부선·경원선·경의선 방면 등 4개 지역으로 나누고, 박래원은 호남선과 경부선 방면의 중심지인 대전, 민창식은 경의선 방면의 중심지인 사리원이나 경원선 방면의 중심지인 원산을 근거로 활동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244)<박래원 신문조서(1회)>(고려대 아연 소장자료, 문서번호 100호), 338∼340쪽. 이 과정에서 천도교 청년동맹원을 통한 지방 확산 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 서울 시가지에는 6월 8일 밤을 기해 배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해의 김단야로부터 6월 초까지 오기로 한 격문과 자금이 전달되지 않아 출발이 지연되었고, 박래원은 천도교의 지도인사인 권동진에게 급히 자금요청을 하여 1만원 가량의 자금지원을 약속받고 기다리던 중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발각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의 계획이 한참 추진 중이던 1926년 5월 경, 일제는 중국인 위조지폐범이 일본 오사카에서 서울로 잠입했다는 정보에 따라 범인색출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1926년 6월 4일 도렴동 50번지 李東圭의 집을 수색하던 중 화장실에서 위조지폐와 함께 대한독립당 명의로 된 격고문 1장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사망을 좁혀간 일제는 결국 이것이 이상우를 통해 안정식에게 건네 준 것이 다시 이동규에게 건네진 연결통로를 밝혀내고 이상우의 처인 고우섭이 근무하는 개벽사를 급습하여 격고문 상자를 찾아냈던 것이다.245) 지중세 역편,≪조선사상범 검거실화집≫(돌베게, 1984), 28쪽.

 그리하여 천도교 인사들은 박래원을 비롯하여 천도교당 현장에서 50여 명이 체포된 데 이어 발각 당일에만 천도교 간부와 개벽사 인사 80여 명이 체포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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