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1. 6·10만세운동
  • 4)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

4) 학생들의 만세시위 추진

 6·10만세운동에는 학생들도 추진주체로 참가하였는데, 대표적인 집단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세칭 통동계를 들 수 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1925년 9월 서울에서 창립되어 1920년대 후반 서울지역 학생운동을 선도한 단체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창립 초기 70∼80여 명의 회원으로 출발했으나, 6·10만세운동 무렵에는 500여 명에 달할 만큼 세력을 키워나갔다.246)6·10만세운동 당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이하 ‘조과연’)의 사무소는 견지동 98번지에 위치하고, 회원은 509명이었다(一記者,<在京學生團體의 內面>,≪開闢≫72, 1926, 50쪽).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창립 초기 일정하게 조선공산당 내지 고려공산청년회와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공산당의 6·10만세운동 추진방침 및 전술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내에 일정하게 관철되었으며, 특히 6·10만세운동을 책임맡았던 권오설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247) 장석흥,<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초기 조직과 6·10만세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참조.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추진한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은 대략 4단계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단계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학생 80여 명이 세검정으로 야유회를 가던 도중 융희황제의 승하사실을 알게 된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제2단계는 李柄立이 권오설을 통하여 만세운동의 계획을 전달받은 5월 3일 경부터 5월 19일까지, 제3단계는 각급 학교 학생 40여 명이 朴河均의 하숙에 모여 만세운동 계획을 협의했던 5월 20일부터 6월 5일까지, 그리고 제4단계는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만세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6월 6일 경에서 의거 당일까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단계는 융희황제의 승하사실을 접하고, 3·1운동 때와 같은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의식은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고, 각급 학생 대표들이 모일 것을 다짐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제2단계부터이다. 이병립이 권오설로부터 6·10만세운동의 계획과 투쟁지침을 전해 들은 것은 5월 3일이었다. 조선공산당에서 6·10만세운동의 결행을 결정한 다음날에 조선공산당의 방침이 이병립에게 전달되어진 것이다. 이때 권오설은 6·10만세운동 계획과 투쟁지침을 알리는 한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와 역할을 지시하였다.248) 朝鮮總督府 警務局,≪(극비문서)광주항일학생사건자료≫, 392∼393쪽.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주요 임무는 인산 당일 가두행렬에서의 만세선창과 격문살포였다. 당시 인산행렬의 가두에는 학생들이 배열될 예정이었고, 또한 3·1운동 때 학생들의 활약을 경험한 터였으므로 6·10만세운동의 선봉 역할을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병립·李先鎬·李天鎭·趙斗元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은 수차에 걸쳐 학생 동원 및 시위방법 등을 숙의하면서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워 나갔다.249) 이천진,<육십운동의 회고>(상), (≪독립신보≫, 1946년 6월 10일). 즉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들 사이에서 고조되던 항일적 분위기가 조선공산당에서 계획한 만세시위의 지침과 접맥되면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만세운동이 구체화되어 갔던 것이다.

 제3단계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를 중심한 만세운동의 계획이 학생계로 파급되면서, 의거 준비가 성숙되어간 과정이다. 5월 20일에 각급 학교 학생 대표 40여 명이 가졌던 모임에서는 의거의 투쟁방법 및 자금조달 등에 대한 협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朴斗鍾·이천진·박하균·이병립·이선호 등 5명을 준비책임자로 선임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들이었다. 이때 박하균·박두종 등은 자금 조달의 책임을 맡았고250) 정세현,<6·10만세운동>(≪한국근대사론≫2, 지식산업사, 1979), 190쪽. 박두종과 박하균은 5월 하순에 귀향하여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였다., 이선호와 이병립 등은 학생 포섭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251)<6·10만세운동 판결문>(6·10만세기념사업회 편,≪6·10독립만세운동≫), 213∼215쪽.

 그리고 세칭 ‘통동계’ 학생들과의 연결도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즉 5월 20일 이후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학생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통동계’의 계획과 활동을 접하게 되면서252) 박용규 등 ‘통동계’의 학생들은 5월 16일에 민족적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동지들을 포섭하여 23일에는 각급 학생 50여 명과 함께 의거의 방법을 논의하였으며,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투쟁방침을 정한 뒤 26일부터 5일 동안 격문을 인쇄하고, 6월 8일 전국 각처의 학교를 대상으로 격문을 발송하였다(<6·10만세운동 판결문>, 6·10만세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214∼215쪽).
≪동아일보≫, 1927년 3월 26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 두 계열의 학생계는 비밀유지를 위해 거사를 각기 추진키로 하되, 거사 당일의 의거장소를 안배하는 등 연대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제4단계는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추진해 간 과정이다. 조선공산당이 발각된 것은 6월 6일이었다. 이전까지 만세운동의 계획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는 거사 당일에 필요한 격문·선전문 등을 조선공산당에서 작성·인쇄한 것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53)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만세운동 때 사용할 격문의 작성·인쇄 작업이 6월 8일 이전까지는 보이는 않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측에서의 계획이 발각되기에 이르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는 독자적으로 준비를 추진시켜 갔다. 이들은 이때부터 태극기 200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을 제작하는 한편 이병립이 격문을 초안하여254)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격문의 내용이 “이천만 동포여!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와 같이 간단한 것은 준비기간이 촉박했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인쇄에 들어갔다. 인쇄기의 구입은≪시대일보≫배달원 김낙환이 맡아 명함인쇄기 1대를 구하였고, 김규봉이 종이를 구입하여 5명의 학생이 사직동 이석훈의 집에서 주야로 6월 9일까지 격문 1만여 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255)<6·10만세운동판결문>(6·10만세기념사업회 편, 앞의 책), 212∼213쪽. 그리고 6월 9일부터는 학생들에게 격문을 배포하면서 인산 당일의 만세시위를 추진해 갔다. 이때 격문배포는 주로 이선호와 박두종·박하균 등이 맡아 우선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에게 배포되었다. 이선호는 중앙고보생 권태성·유면희와 연희전문생 권오상·홍명식·박한복에게 태극기 수장과 격문을 배포하였으며, 박두종은 김낙환에게 격문 300장을, 조선기독교청년회 영어과 학생 유원식에게 200장을, 근화여학교 학생 김정자에게 100장과 태극기 1장을 교부하였다. 이천진은 중동고보생 김인오에게 격문 600장과 태극기 2장을 전달하였다. 박하균은 연희전문학교생 김규봉에게 격문 50장, 이석훈에게 600장, 韓一淸에게 30장을 교부하였다. 그리고 유면희는 중앙고보 학생인 임종업·이현상에게 각각 50장을 나누어 주고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256)<6·10만세운동 판결문>(6·10만세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참조. 이때 이들은 인산 당일에 혼란할 것에 대비하여 호각의 신호에 의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인산 당일의 의거에 맞추어 급박하게 준비를 진행시켜, 당초의 계획대로 의거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칭 통동계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는 별도의 고보생들을 중심으로 한 추진 주체로서, 중심인물은 5∼6명 정도에 불과한 규모였다. 뚜렷한 조직을 기반으로 한 세력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을 거사를 계획했던 곳인 通洞의 이름을 따서 ‘통동계’라257) 이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같이 조직기반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교나 출신이 동일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이들의 명칭을 ‘통동계’로 사용하기로 한다. 가리켜 왔다.

 이들의 동지적 결합은 같은 학교의 학우 내지는 하숙집 친우관계로 서로 얽혀져 있었다. 융희황제가 독살되었다는 풍설과 함께258) 朴龍圭,<因山에 모여든 ‘民族의 痛憤’>(≪신동아≫1969년 9월호), 302쪽. 4월 28일 송학선의 금호문의거가 일어나면서 통동계 학생들은 항일투쟁에 대한 결심을 굳혀 갔고, 그것을 민족적 사명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259) 위와 같음. 3·1운동 때처럼 전국적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의지를 모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무렵의 상황이 3·1운동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던 점이다. 국제정세의 객관적 조건이나 민족운동세력의 주관적 조건이 크게 변화되어 있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민족에 대한 지배력이 더욱 공고해졌으며, 국내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분열정책에 의해 개량국면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국제정세나 국외세력의 변화보다는 국내 민족세력의 개량화가 직접적이고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崔麟이 그랬던 것처럼 3·1운동 때의 지도세력들 대부분이 일제와 타협적 경향을 보이며 민족운동의 범주에서 이탈해 가고 있었다. 식민지 분열정책에 편승한 자치론의 대두는 이 무렵의 국내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개량국면은 이들로 하여금 기성세대와 연대 또는 합류를 포기한 채,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게 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260) 운동의 주체였던 박용규는 당시의 상황을 “1920년대 후반의 민족주의운동은 현저히 저하된 편이었으며 앞장 서서 친일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발벗고 나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지도 못하는 어리벙벙한 풍조가 상당히 짙은 편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위와 같음).

 이들의 거사 추진과정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단계는 거사계획의 구상과 동지포섭(5. 16∼5. 25), 제2단계는 만세운동을 위한 격문 작성과 인쇄(5. 26∼5. 31), 제3단계는 선언문 배포와 인산 당일의 거사(6. 1∼6. 10) 등으로 구분해 살필 수 있다.

 제1단계에서는 이들이 因山日을 전후하여 거사를 하기로 원칙적 합의를 이루었다. 구체적 투쟁방법에 대해서는 확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우선 이들은 서울의 각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때 지역을 둘로 구분하여, 李東煥이 제일고보와 동쪽방면의 학교를 맡고, 金載文·黃廷煥은 보성고보와 서쪽방면의 학교를 맡기로 했다.261) 李東煥 述懷,<두갈래의 抗日擧事>(≪경향신문≫, 1963년 6월 10일). 이들은 일주일만에 5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할 수 있었고,262)이때 참석한 50여 명의 학생은 단언하기 어려우나 통동계 학생들과 동향의 친우 및 선후배를 중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5월 23일에는 성북구 삼선평에서 축구시합을 위장하고 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때 투쟁방법에 대해 논의가 있었는데,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기관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충정로(本町) 일대의 폭파와 같은 보다 강력한 투쟁방법이 제시되기도 하였다.263) 李東煥,<6·10萬歲事件의 眞相>(≪中央≫, 1974년 10월호), 268∼269쪽. 그러나 이같은 투쟁방법은 일동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해산 후 통동계 학생 5명은 24·25일 이틀 동안 회의를 거듭하여 건물폭파와 같은 과격한 투쟁방법은 정세로 보아 실현가능성이 어렵다고 결론을 내리고, 융희황제 인산일을 기해 3·1운동 때와 같은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제2단계에서는 앞서의 결의에 따라 거사에 필요한 격문을 작성하고 인쇄 작업에 집중하였다. 5월 26일에 황정환·김재문이 낙원동 255번지 김성기로부터 등사판을 빌려왔고, 이동환은 용지를 구해 왔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고향에서 보내오는 생활비의 일부와 외투·책을 팔아 충당하기로 하였다.264)≪경향신문≫, 1963년 6월 10일. 5월 28일 이동환·김재문이 인쇄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고, 5월 29일 통동 71번지 김재문의 하숙에서 논의를 거쳐 공동으로 격문을 작성하였다.265)<6·10만세운동 판결문>(6·10만세기념사업회 편, 앞의 책), 214쪽. 작성된 격문은 5월 31일까지 박용규의 하숙에서 5,000여 장 정도가 인쇄되었다.266) 박용규는 3만 장이라고 하고 있으나, 판결문에는 약 5,000장을 인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3단계에서는 인쇄물 배포를 위한 동지포섭 및 배포와 인산 당일의 거사로 이어진다. 5,000여 장의 격문을 1인당 1,000장 정도를 맡아 포섭된 동지에게 배포하는 한편, 6월 8일과 9일에는 시내 각 학교와 전국 주요 지방학교에 격문을 발송하면서 인산 당일의 거사를 추진시켜 갔다.267)이때 이들은 서울의 학교는 직접 방문하여 선전문을 몰래 집어넣고, 지방의 학교에는 우편물로 발송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는 권오설 등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일제의 경계와 압박이 극도로 가중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민하게 행동하면서 격문배포와 발송을 마칠 수 있었다. 박용규는 중앙고보생 조홍제에게 격문 200장을, 휘문고보생 이상민에게 100장을 교부하였고, 이동환은 중앙고보생 최제민에게 400장을 교부하면서 인산 당일 만세제창을 권유하였다.268) 중앙중고등학교,≪中央六十年史≫ (19 6 9 ), 129쪽.

 이 과정에서 이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일정하게 연대해 갔다. 통동계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계획이 처음에는 각기 출발했어도 거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연결되어 갔던 것이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과 통동계는 동지를 포섭해 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269) 李天鎭,<六·十運動의 回顧>下(≪獨立新報≫1946년 6월 11일).
≪동아일보≫, 1926년 11월 4일. 李東煥의<법정 진술>기사 참조.
이들 두 세력은 거사를 연합해서 추진할 뜻도 있었지만, 각기 별도로 추진해 왔던 것을 합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또 비밀을 보전하기 위해 각기 추진하기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서로의 연락이 필요하므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선호와 중앙고보 동급생인 이동환과 박용규 등이 양측에서 연락을 담당하면서 연대 투쟁을 추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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