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1. 6·10만세운동
  • 5) 만세시위의 전개와 성격
  • (1) 서울의 만세운동

(1) 서울의 만세운동

 조선공산당과 천도교계통의 거사계획이 因山을 불과 3일 앞두고 발각되자, 일제는 모든 경찰력과 군대를 동원하면서 철통같은 경계를 펼쳐 나갔다. 그리고 사상단체·종교단체·학교 등에 대해서도 대대적 검속을 단행하였다. 서울역·용산역·청량리역과 여관·음식점 등에 이르기까지 출입자에 대한 검문·검색도 강화해 갔다. 6월 7일 총독 사이토는 정무총감을 직접 지휘하여 조선군사령관과 함께 향후 대책을 강구하는 등 총력적이고도 전면적인 탄압을 가해 왔다.

 서울에 동원된 일본 군대는 의장병·도열군대·봉결식장경계대·조포대 등 약 1만 명에 달하는 그야말로 삼엄한 상황이었다. 일제는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각도에서 경찰을 집결시켜, 3,500명의 경찰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헌병대사령부에서 나남·함흥·평양 등지로부터 응원 헌병을 충원하여 경찰의 경계를 지원했다. 그리고 장례인도에 기마경찰·헌병·정사복 경관 등을 총검으로 무장시켜 거리로 내몰아 인산 당일의 거리는 온통 일본군대와 헌병·경찰로 가득 찼다.

 그러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사직동 李錫薰의 하숙집에서 격문을 인쇄하면서 거사 준비를 진행해 갔고, 통동계 학생들 역시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서 각 학교와 지방에 전단을 배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인산 당일의 만세운동을 위한 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시켜 나갔다.

 인산 당일 장례행렬이 지나갈 연도 양측에는 약 2만 1,000여 명의 중등 이상 각급 학교 학생들이 도열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 학생들의 도열 앞뒤로는 기마경찰과 헌병·사복경찰이 포위하며 엄중한 경계와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일제는 인산행렬이 끝나는 대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사의 책임 아래 해산하도록 철저히 사전단속을 하였고, 또 당일날에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겹겹히 경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서울의 거리는 조선박람회의270) 조선박람회는 융희황제의 국상중인 5월 13일부터 경복궁에서 열렸다. 구경거리와 조선의 마지막 인산을 구경하고자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서울역에서 승하차한 인원만도 6월 1일부터 일주일 동안에 무려 8만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원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5배나 증가된 것이었다. 여기에 용산·청량리·왕십리역까지 합치면 10만 명을 훨씬 넘는 숫자였다. 한편 시내를 다니는 전차에는 하루 평균 10만 명이 이용하였고, 인산 習儀日인 7일에는 15만 명이 이용하여 일대 교통혼잡을 이루었다.271)≪동아일보≫, 1926년 6월 9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 학생들은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일제의 삼엄한 경계와 감시망 속에서도 거사를 계획대로 추진하여 인산 당일에 만세운동을 거행할 수 있었다.

 1926년 6월 10일 장례행렬은 오전 8시 창덕궁에서 발인하여 종로 3가-청계3가-을지로3가-을지로6가-훈련원(영결식:오전11시)-동대문-창신동-신설동-청량리-金谷裕陵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오전 8시 반 종로 3가의 만세시위를 신호탄으로 하여 모두 8곳에서 일어났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단성사 앞의 시위 : 오전 8시 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국장행렬이 통과한 뒤 東洋樓 앞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보 이선호의 선창으로 중앙고보생 30∼40명이 만세를 고창하면서 격문서 약 1,000여 장과 태극기 30여 장을 살포하였다. 이에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호응하면서 일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로써 大輿 뒤에 따르던 기병의장대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돌아서서 달리는 바람에 군중이 이리저리 몰리다가 중경상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이때 만세를 고창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학생은 연희전문학교 김규봉·이석훈, 중앙고보 이동환·박선석·홍명식·주공조 등 50여 명에 달했다. ② 오전 8시 40분 대여가 지나자마자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등 50여 명이 격문서를 살포하며 만세를 고창했다. 관수교 남쪽 부근에서는 이병립과 연희전문 박하균·이천진이 앞장서서 격문을 날리며 만세를 고창하자 학생들이 호응하였고, 이때 일경에 의해 주동인물인 이병립·박하균·이천진을 포함하여 학생 40여 명이 강제 연행되었다. ③ 오전 9시 반 경에 청년학원 생도 박두종 외 2명의 청년이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격문 1,000여 장을 살포하며 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만세시위는 격렬하게 이루어져 부근의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 박두종은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④ 오후 1시 경 훈련원 재전 부근에서 학생 1명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고창했다. 훈련원 서쪽 일대에서 천세봉의 선창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⑤ 오후 1시 10분 경 동대문 부인병원 앞에서 대여가 지나간 후≪시대일보≫김락환외 2명이 격문서를 뿌리며 만세를 고창했다. ⑥ 창신동 채석장 입구에서 50세 가량의 사람이 만세를 고창했다. 홍종현(37세)이 혈서를 쓰고 투쟁에 참가하였다. ⑦ 오후 1시 45분 경 대여가 신설동 고무회사 앞을 지나갈 때 학생 1명이 격문서 100여 장을 살포했다. ⑧ 오후 2시 20분 경 동대문 밖 東廟 앞에서 학생 4명이 관수교 부근에서 살포한 것과 같은 격문서 700여 장을 살표했다. 살포한 학생은 ‘통동계’의 박용규·곽대형·황정환·이동환 등이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 무렵까지 계속하여 일어났다. 학생들은 가슴에 간직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준비해온 격문을 군중을 향하여 힘차게 뿌리면서 “大韓獨立萬歲” 를 고창하였다. 일제의 그토록 삼엄한 경계와 철통같던 감시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여덟 곳에서 일어난 이날의 만세시위에는 500∼600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272)≪동아일보≫, 1926년 6월 14일. 일제는 당초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 500∼600명을 모두 검거하려고 했으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주동자만 대상으로 처리하기로 방침을 변경하였다. 을지로 부근에서 일어난 시위는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로 격렬하였다. 동대문 앞 시위현장에서는 일본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고, 70∼80여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273) 이때 만세고창으로 일대가 혼잡을 이루게 되어 이곳에서만 7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의 사정을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인 白石은 “자세한 통계는 알수 없으나, 여하간 부상자가 수백 명에 달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하여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한다(≪동아일보≫, 1926년 6월 12일). 그런 가운데 창신동 입구에서는 홀홀단신으로 혈서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고창한 홍종현 같은274)홍종현은 경북 의성출신으로 3·1운동 때에도 만세시위에 참가한 경력의 열혈인사였다. 그는 단독으로 거사에 임하였으며, 혈서로 “독립만세”를 쓰고 그 가운데 태극기를 그린 것과<우리는 자유를 얻고자 싸우자>라는 격문을 써서 거사 당일에 사용하였다.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 군중은 일제 기마병과 군경의 삼엄한 경계 아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군중 가운데 몇몇 만이 호응하는 정도였고, 대부분이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된 학생만도 210여 명에 달하였다.275)≪동아일보≫, 1926년 6월 11일. 이때 체포된 학생들을 학교별로 보면, 연희전문 42명, 중앙고보 58명, 세브란스의전 8명, 보성고보 7명, 그 밖에 중동학교·양정고보·배재고보·송도고보 학생들이었다.

 인산 당일 봉도에 참렬했던 시내 각 학교에서는 12일 返虞式276) 장사를 지낸 뒤에 神主를 집으로 모셔오는 式을 말한다.에도 봉영할 계획으로 있었다. 그런데 인산 당일에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 속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 당국은 학생들의 봉영을 전면 금하고 경찰과 군인으로 대체하였다. 返虞행렬 때에는 동대문에서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연도에 2,000여 명의 경관을 배치하고 경찰부장 이하 각 경찰서장이 진두 지휘하면서 경계를 강화했다. 그리고 사복경찰을 골목마다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를 원천 봉쇄하고자 했다.

 일경의 물샐틈없는 경계 속에서도 새로운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의 계획이 추진되어 갔다. 배재고보생 문창모를 중심한 기독교계통의 학생들은 인산 당일의 운동이 일반 민중의 호응을 크게 얻지 못하자 재차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던 것이다. 이들은 인산 당일 봉영대열에 있다가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277) 문창모는 이때 수표교 근처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한다(<문창모(1906년생) 증언>, 1995년 6월 27일 면담). 그리고 만세현장에서 만세를 선창한 학생들이 일경에 잡혀가는 것도 보았다. 그리하여 이에 자극을 받은 문창모·손성엽 등은 보다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평소 기독교학생회의 모임에서278)<문창모의 증언>. 친분이 있었던 7개 학교의 간부들과 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해 갔다. 이때 7개 학교란 배재고보를 비롯하여 협성학교·피어선성경학원·기독교청년학원 등의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279)<문창모의 증언>에 의하면 이밖에도 정신여고보, 이화·연희전문학교의 학생들도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대문 73번지에 소재한 피어선성경학원 기숙사에 모여 격문 수만 장을 인쇄하는 등 2차만세운동의 거사를 계획해 갔다.

 그러나 추진과정에서 계획을 탐지한 일경이 6월 16일 오후 2시 경 피어선성경학원 기숙사를 습격하여 동 학원생 우재헌을 비롯하여 배재고보 김동진, 중앙기독교 청년학원 김동석 등 3명을 검거하는 동시에 등사판 기계와 종이 수천 장을 증거물로 압수해 갔다.280)≪조선일보≫, 1926년 6월 19일. 이어 18일 새벽 협성학교 김승호와 배재고보 5년생 문창모 등 4명이 정동에서 피체되면서 이들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들의 거사계획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일제의 경계와 감시가 그토록 삼엄한 속에서, 그것도 인산 당일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잡혀가는 것을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추진되어 간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에 대한 정의의 항거였으며, 그 정의의 항거는 일제의 온갖 탄압과 강제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적 의지의 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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