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1. 6·10만세운동
  • 5) 만세시위의 전개와 성격
  • (2) 지방의 움직임과 만세시위

(2) 지방의 움직임과 만세시위

 일제는 6월 6일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의 계획이 탄로남과 동시에 지방에서도 대대적으로 검색·체포에 나섰다. 일제의 탄압과 수색은 전국 각처에서 종교단체와 청년사회단체, 학생 등 모두를 대상으로 철저하게 검색·체포가 이루어졌다. 대구에서는 목사·사회단체 인사 20여 명이 서울의 만세운동 계획과 연결된 혐의로 체포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281) 이들은 융희황제 인산 직후에 무혐의로 풀려 나왔다(≪동아일보≫, 1926년 6월 14일). 평양에서는 노농연합회·청년동맹·면옥노동조합과 같은 대중단체나 사상단체에 대해 대대적 수색에 나서는 한편 ‘요주의’인사들에 대해 철저한 감시를 취하였다.282)≪동아일보≫, 1926년 6월 11일. 신천의 경우처럼 학교장 및 교원들이 검거되는가 하면, 친목회의 모임까지 금지시키는 등 집회 자체를 원천봉쇄했다.

 6월 8일부터는 군경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철야 경계에 돌입하였다. 기차역이나 주요 지역에는 군경이 배치되어 마치 계엄상태의 분위기로 몰고 갔다. 일제 군경은 시내의 여관이나 음식점 등을 수색하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를 보이면 검속하는 한편 사람의 왕래가 잦은 정거장 등에서 왕래객에 대한 철저한 검문·검색을 단행하였다. 지방 각지에서 인산 봉도를 위해 상경하는 사람들에게는 갖은 구실을 붙여 억제, 저지하였다. 그것은 3·1운동 때 상경하여 인산에 참가했던 지방인사들이 귀향하면서 만세운동을 전파하였던 경험에 의거하여,283) 이정은,<3·1운동의 지방확산 배경과 성격>(≪한국독립운동사연구≫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311∼314쪽. 혹시나 일어날지 모를 만세운동의 조짐이 지방으로 파급될 여지들을 철저하게 차단하고자 하였던 때문이다.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던 일제는 인산 당일인 6월 10일 새벽 전국에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요주의’인사들을 강제 구금하였다. 이는 혹시나 인산 당일에 만세시위가 일어날 것에 대비한 최종의 사전 봉쇄책이었다.

 일제가 이렇듯 전력을 기울인 것은 3·1운동 때 지방으로의 확산을 사전에 저지치 못한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3·1운동 때 일제는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리라고 전혀 예기치 못하다가, 만세운동이 불같이 번져 오른뒤에야 폭압적으로 ‘진압’에 나섰다.284) 윤병석,<3·1운동에 대한 일본정부의 정책>(≪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동아일보사, 1969), 417∼418쪽. 3·1운동의 초기에 일제는 전민족적인 만세운동으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일부 운동자의 ‘선동’에 의해 일어나는 정도로 판단하고 주동자만 체포할 방침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만세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국내 주둔의 조선군 19·20 사단,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따라서 융희황제 인산 때에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제의 무력을 총동원하며 아예 만세운동의 기미를 싹부터 잘라버리자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일제의 대응과 탄압은 6·10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지 못한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융희황제의 승하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국의 한국인은 전면휴업, 撤市에 들어가 근신하는 것과 함께 대부분의 학생들이 휴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망곡과 봉도식은 成服日인285) 成服日이란 초상이 났을 때 喪服을 처음 입는 날이다. 5월 1일 무렵까지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4월 29일 통곡의 현장에서 심훈이 읊은<痛哭속에서>라는286)≪시대일보≫, 1926년 5월 16일.≪시대일보≫에는 본명인 沈大燮으로 기재되어 있다. 애도시에서 묘사되듯이 한국인은 일제 군병의 총검과 말발굽 아래에서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통곡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일제의 통제 속에서 일체 보도금지되었던 4월 28일의 송학선 의거에 대해 5월 2일 보도통제가 해제되자,287)≪시대일보≫, 1926년 5월 2일.
≪동아일보≫, 1926년 5월 2일.
각 언론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

 5월 10일부터 6월 초까지는 망곡과 봉도가 뜸해지다가 인산일이 다가오면서 전국 각처에서는 봉도단을 구성하여 상경을 준비하였으며, 인산일에는 전국에서 일제히 망곡과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망곡과 봉도에 참가하는 계층은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연령별로는 유치원생에서 보통학교생·청년·노인에 이르기까지, 직업별로는 학생·상인·이발업자·유림·직공·기생·불교승려·목사·역부·관리·서적상·한약상 등 나이와 직업에 관계없이 전 민족적으로 참가하였다.288) 장석흥,<융희황제 인산 전후 지방의 동향과 만세시위>(≪한국학논총≫20,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97), 123∼130쪽.

 나이어린 幼年會나 소년회, 보통학교 학생들이 망곡과 봉도를 독자적으로 거행했으며, 전국적으로 볼 때 고등보통학교 학생보다 보통학교 학생들이 월등히 많았다. 그것은 당시에 고등보통학교가 도청소재지 정도에만 세워질 정도로 적었던 때문도 있겠지만,289) 1925년도 기준으로 볼때, 전국에 고등보통학교는 23개교에 학생수는 10,185명이었다. 그런데 이 중 서울 소재의 학교를 제외하면 지방에는 도청소재지에 세워지는 정도였다. 이밖에 사범학교는 14개교에 2,373명이었다(≪朝鮮總督府施政年報≫, 1925년도 敎育條 참조). 지방에서는 학생층의 경우 보통학교가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린 幼年들까지 망곡에 참여할 만큼 애도의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적어도 애도의 정도는 1919년 光武皇帝의 승하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290) 광무황제의 국상을 당하여≪每日申報≫는 1919년 1월 27일부터 인산 전날인 3월 2일까지<國葬彙報>를 통하여 국장에 관한 소식들을 보도하였고, 望哭과 奉悼에 대한 것은 산견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每日新報≫가 민중의 동향보다 일제 당국의 행사에 관심을 표명한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학생들의 민족적 정서는 일제 당국이나 일본인 교사들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되고 있었다. 당시 학교 당국은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의 망곡과 봉도식을 철저히 억제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교장 및 교원은 학생들에게 온갖 형태의 탄압을 자행하였고, 이로써 학교측과 학생들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학교측에 대항하며 휴학을 단행하거나, 학교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자적으로 봉도식을 거행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제 금구보교·홍성보교·여산보교·원주보교·강화길상보교·영일보교·울산보교·강경보교·삼천포보교·흥덕보교·덕산보교·나주보교 등에서는 학교측이 망곡이나 봉도를 억제함으로써 학생들은 盟休로 대항하였다. 그런가 하면 지방의 학생들이 봉도를 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맹휴를 하고 서울로 올라온 경우도 있었다.

 이때 학교측은 주동학생을 구타하거나 처벌함으로써,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강경보통학교에서는 허가없이 망곡했다고 하여 학교 당국으로부터 무기정학을 당하는가 하면, 서산에서는 학생들이 시내 상점의 철시를 권고했다고 하여 20일간 구류를 받고, 연천에서는 망곡했다고 경찰서에 끌려가 주의를 받았다. 철원보교에서는 학생이 모자에 북포를 둘렀다고 해서 교사에게 구타당하기도 했다. 또한 부여보통학교, 대구 예수교 경영학원 순도학교, 공주보교에서는 국상 중에 금지된 창가와 가무를 교습함으로써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맹휴에 들어가기도 했다. 또한 강화도 길상보통학교에서는 학생들이 喪章을 달았다고 교장과 교사가 학생들을 구타한 일이 있었고, 이에 항거하는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특히 길상보통학교의 맹휴는 학교측의 탄압이 사회문제로 비화되면서 민족감정을 자극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은 여전히 자행되면서, 보통학교 학생들을 경찰서에서 소환하여 제재하는 일도 있었다.291) 장석흥, 앞의 글(1997) 참조.

 학생들의 요구에 의해 망곡과 봉도식이 설령 거행되더라도 그 행사는 반드시 일본인 교장의 주도하에 치루어졌다. 원주보통학교의 경우, 융희황제 인산과 서울에서 6·10만세운동의 소식을 들은 6학년 학생과 고등과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며 맹휴에 들어갔으며, 상급생들은 학교의 뒷산 鳳山과 南山 숲속에서 서울 방면을 향하여 망곡을 하며 나라 없는 설움을 달래었다. 그런데 정보를 접한 일경이 추격하자, 학생들은 산길을 따라 탈출하여 이튿날에도 동맹휴학을 이어 나갔다. 그리하여 하는 수없이 일본인 교장이 학교에서 정식으로 망곡제를 거행할 것을 제의하여 겨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292) 趙東杰,≪太白抗日史≫(강원일보사, 1976), 248∼250쪽. 그러나 이 일로 일본인 교장 篠原實은 파면조치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보통학교를 중심한 지방에서의 맹휴는 망곡과 봉도를 금지하는 학교 당국과 이에 대항하는 학생층간의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지방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경우를 보면, 고창보통학교와 인천 만국공원에서 수십 명 규모로 만세시위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혼자 또는 몇 사람 정도의 규모로 진행되었다. 완도의 모도청년회는 만세운동을 추진하다가 사전 발각되기도 했다.

 고창보통학교의 만세시위는 특히 주체가 보통학교 학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무렵 학생운동은 고보생이나 전문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6·10만세운동 때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의 경우도 전문학교 학생과 고보생이 중심을 이룬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같은 학생운동단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293) 장석흥, 앞의 글(1994) 참조. 그런 점으로 볼 때, 보통학교 6학년인 10대 중반의 어린 소년들이 만세를 고창하고 나선 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특히 식민지통치체제 아래 태어나서 성장한 이들이 또한 조직적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는 사실은 식민지 통치의 모순을 극명하게 노정시킨 상징적 사례인 것이다.

 단독으로 행한 것으로는 전남 영광의 송형욱 부부, 함남 풍산의 유재봉 같은 열혈청년, 춘천의 김상식, 신의주의 문봉순 등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한편 안성에서의 선언서 배포, 고원에서 천도교 종리사 김태일이 해외 독립군단체에서 반입된 선언서를 등사하여 배포하다가 발각된 사실, 진주지방의 봉도식에서 선언서 수십 장이 유포되어 있었던 사실 등은 인산을 전후한 시기에 만세운동과 같은 조짐이 다양하게 일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해외독립군단체에서 선언서가 반입되었다고 하는 것은 정체가 불명하지만, 진주지방에 선언서 수십 장이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서울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생적으로 계획되어 간 모습들을 보여주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산발적이나마 인산 당일을 기해 각처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거나 공주 유림 盧梗이 민족적 울분이 솟구쳐 자살을 기도한 사례들은 일반 대중에 잠재된 항일의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항일의식의 분출은 일제의 철저한 탄압에 의해 조직적인 만세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채 차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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