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1. 6·10만세운동
  • 6) 6·10만세운동의 이념

6) 6·10만세운동의 이념

 6·10만세운동 당시 작성된 격문이나 전단 등은 크고 작은 것들을 포함해 8종이 확인된다.294) 이석태,≪사회과학대사전≫(1948), 487쪽에는 6·10만세운동 때 20여 종의 선전문이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격고문>과 傳單의 각 항목들을 개별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별도의 것이 아니라 4개의 전단 속에 들어있는 항목들이다. 권오설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는 大韓獨立黨 명의의<檄告文>과 그밖의 전단들인<大韓獨立萬歲>·<大韓獨立運動者여 團結하라>·<朝鮮人 敎育은 朝鮮人本位>·<산업은 조선인본위>등과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의 기관지 불꽃사 명의로 작성한<腹喪 慟哭하는 民衆에게 檄함>, 그리고 학생주체들이 작성한 2개의 짧은 격문 등이 그것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격고문은 6·10만세운동의 始原을 3·1운동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독립은 정의와 평화의 실현으로 정의되고 있음도 살펴진다.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조선독립만세’의 구호를 내세움으로써 絶對獨立을 최고의 이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격고문은 구체적 방법으로써 일제의 침략으로 死地에 놓인 상황에서 망곡과 같은 감상적 설움만으로는 독립을 절대로 달성할 수 없으므로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혁명적 민족운동자의 단결을 주장하고 있다. 즉 망국의 통한을 망곡으로 낭비할 것이 아니라 독립 달성을 위해 민족적 대단결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격고문의 이같은 논리는 3·1운동 당시 선언서의 논리와 비교할 때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에서는 대체로 세계 개조의 분위기에서 인도주의·민족자결론·고유주권설 등에 따라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295) 3·1운동 당시 선언서는 여러 가지가 있다. 때문에 3·1운동의 독립논리는 일률적으로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정리해 보면, 국제감각은 세계 개조의 시기로 보았고, 독립논리는 인도주의에 바탕한 동양평화론과 민족자결론이 주되었으며, 방략으로는 광명정대한 전민족의 시위, 국제회의에 대한 기대, 독립군의 살신성인 등으로 표현되고, 독립국가상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趙東杰, 앞의 글, 1989, 398∼404쪽). 그리고 일본을 경제적 침략자로 규정할 안목을 갖지 못한채, 정치적 침략주의·강권주의·제국주의 등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침략뿐 아니라 경제적 침략의 관점에서도 일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격고문의 논리는 3·1운동 때 자유주의의 논리에 비해 그 사상적 기조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의 수용과 더불어 성숙되어간 민족이론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민족을 총체적으로 무산자계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계급으로 규정하면서, 민족적·정치적 해방과 계급적·경제적 해방을 동일한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분리하지 않은 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격고문의 논리는 계급지상주의에 대한 편향성이 극복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민족혁명을 위해 자유주의자와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이론적 단서로도 주목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들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운동의 선봉’에 나서야 한다는296) 이는 1926년 5월 초 김단야가 권오설에게 융희황제의 승하를 기회로 삼아 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언급된 바 있다(지중세 역편, 앞의 책, 40쪽). 노선을 여기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은 ‘대한독립당’ 명의로 격고문을 발행하고 있는 것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한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단체의 명칭에서도 민족혁명이 강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전단에서는 당시 식민지 한국사회 전반에서 제기되던 당면과제들이 거의 망라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회 각 부문의 문제들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만세운동의 확산과정에서 모든 계층의 참여를 기대하였던 때문으로 이해된다. 계급적 구호가 강조되지 않는 점도 그러한 맥락에서 살펴진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는 3·1운동과 비교할 때 운동의 기반과 이념이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경험 위에서 일어난 것이었지만, 운동의 주체와 이념적 측면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며, 민족통일전선을 이룩해 갔던 것이다. 이는 민족혁명에 대한 이론적 발전을 뜻하는 것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