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2. 신간회운동
  • 3) 복대표대회와 신간회의 정비
  • (2) 복대표대회 선출 간부진의 성격

(2) 복대표대회 선출 간부진의 성격

 복대표대회의 간부진의 선출과정을 살펴보면, 전체 14개 구역 중 복대표가 불참한 일본과 평북, 경성지회를 제외한 11개 구역에서 銓衡委員을 1명씩 선출하였다.324) 11명의 전형위원은 경기 공석정, 충북 안철수, 충남 김연진, 경북 권태록, 경남 황상규, 전북 백용희, 전남 장병준, 황해 최승익, 평남 최윤옥, 함북 임서봉, 함남 방치규였다. 이들 11명의 전형위원들은 전국 회원수를 감안하여 56명의 중앙집행위원과 13명의 중앙검사위원을 선출하였고, 중앙집행위원 후보 8명은 이에 앞서 선출되었던 허헌 위원장이 선임하였다.325) 중앙집행위원:홍명희·김항규·공석정·임서봉·안철수·김연진·김명동·조치기·권경섭·황상규·백용희·임재순·여해·손영극·방치규·최승익·김중한·김동훈·박문희·이주연·김병환·金炳魯·鄭在達·鄭鍾鳴·金翰·李灌鎔·趙東赫·李春塾·韓相駿·朴一陽·李基錫·黃義準·李春壽·申周極·全赫·金東鮮·孫角·崔鍾涉·黃渭顯·金昌容·全一·李圖遠·金道欽·蔡奎恒·韓炳洛·李東壽·崔衡植·曺晩植·崔芝薰·李相求·尹赫濟·李龍吉·高成昌·李雲鎬·全景錫·金長煥, 중앙집행위원 후보:趙炳玉·朴熙道·朱翼·金東弼·李會昇·羅承奎·裵鍾哲·裵德秀, 중앙검사위원:위원장 權東鎭, 상무 趙憲泳·李恒發, 郭尙勳·林鍾萬·尹吉鉉·鄭建和·全濤·尹秉球·崔建·최윤옥·신상태·이시완.

 개선 간부진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창립 당시 간부진이 거의 교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집행위원장을 포함한 개선된 간부진 78명 중 창립시의 간부는 金明東·李灌鎔·朴熙道·洪命熹·權東鎭 등 5명에 불과했다. 복대표대회로 새롭게 재편된 개선 간부진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즉 78명의 간부 중 사회주의자로 신상이 확인되는 인물은 38명으로 전체의 40%를 상회하였다.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기 사회주의 진영의 화요회·서울청년회·ML계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당면임무로 삼고 있었고, 그 방편으로 신간회 회원들을 재건운동에 적극 끌어들였다. 화요회계는 모스크바의 東方努力者共産大學 출신들이 귀국하여 벌인 재건운동의 일환으로 특히 신간회본부의 간부진에 가장 현저한 조직적 진출을 보였다. 그러나 신간회의 지방조직이나 노동자·농민층에는 거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서울청년회계 재건운동이 보인 신간회에 대한 전략은 매우 적극적인 것이었고 그 때문에 각 지회에 많은 서울청년회계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서울청년회계가 집중한 곳은 함경북도와 전라도 지역이었다. ML계 역시 신간회 회원을 재건운동의 요원으로 흡수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이었던 ML계는 지방세력을 구축하는데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지회 회원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복대표나 본부 간부진에는 ML계가 포함되지 못하였다.

 복대표대회로 새롭게 탄생한 허헌집행위원장체제는326) 1929년 7월 4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중앙상무집행위원:홍명희·김항규·박문희·金東鮮·이주연·안철수·임서봉·김명동·이춘숙·조치기·한상준, 서무부장:황상규, 부원:이주연·金世振, 재무부장:金炳魯, 부원:김동선, 조직부장:김항규, 부원:임서봉, 선전부장:李鍾麟, 부원:조치기·안철수, 조사부장:이춘숙, 부원:이주연, 교육부장:조병옥, 부원:박문희, 출판부장:박희도, 부원:안철수.
이전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甲山火田民事件 眞相報告演說會,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신간회의 관여와 그것을 대중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민중대회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민중대회는 광주학생운동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려는 시도였으며, 이는 신간회 간부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즉 복대표대회 이후 신임 중앙간부들은 이전의 침체된 활동을 실천적 활동으로 전환하려는 많은 시도를 하였다. 민중대회사건은 그러한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계획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중대회는 반드시 신간회운동만으로 한정시킬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것은 준비과정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종교·언론·주요 사회단체의 연합형태로 구성·계획되었기 때문이다. 민중대회는 사전에 관계자들이 일제에 피체되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신간회 본부와 각 지회는 청년총동맹·근우회와 더불어 1930년 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후 1930년 金炳魯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신간회는 온건화노선을 지향하였고, 이는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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