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2. 신간회운동
  • 4) 지회의 설립과 활동
  • (2) 지회의 성격과 활동

가. 지회의 조직문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간회의 지회 조직이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본부 차원에서는 1년이 경과하도록 신간회 강령에 명시된 이른바 ‘비타협적 정치투쟁’ 지침이나 활동을 전혀 전개하지 못하였다. 물론 이는 일제가 정기대회를 단 한 차례도 허가하지 않을 정도의 강한 탄압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간회 본부의 임원진으로 주로 온건적 민족주의 계열 인사가 포진한 것 또한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때문에 신간회가 설립된 이후에도 그 활동은 기존 사회단체들의 운동방식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물론 신간회가 비타협운동을 지향한다는 점은 누구나 동의하였지만, 비타협운동의 방법 등을 구체적인 것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신간회지회에서 전개한 활동 중 순회강연회, 노동야학, 교양강좌 등은 이미 이전부터 전개된 사회운동이었으며, 소작분규 조사, 東洋拓植柱式會社에 대한 저항, 土地改良會社의 폐지운동, 조선인 본위의 교육 요구, 관리·경찰의 부정·불의에 대한 조사·경고 등도 그러하였다. 때에 따라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와 단결권·파업권의 요구 등은 정치투쟁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투쟁방법에 대해서 신간회는 뚜렷한 행동지침이 없었다. 따라서 신간회의 실질적 활동공간인 지방의 각 지회에서는 젊고 활동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관계로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깊숙이 논의했으며, 핵심은 신간회의 ‘조직문제’로 모아졌다.

 1927년 상반기까지 신간회를 民族單一黨으로 인식하던 각 지회에서는332)≪조선일보≫사설이나 시평에 보면 ‘민족단일당’ 외에도 ‘좌익민족단일전선’, ‘좌익민족전선’이라는 용어도 자주 사용되었다.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신간회를 민족단일당과 구별되는 민족단일당의 매개형태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333)≪朝鮮日報≫, 1927년 9월 16일. 그러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은≪조선일보≫, 1927년 8월 7일자에 실린<민족단일당의 문제>라는 사설이다. 이와 같이 신간회 창립 직후부터 조직형태를 민족단일당의 매개형태로 인식한 것은 조선공산당뿐만 아니라 서울청년회 계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간회가 전국적인 조직 확산에도 불구하고 정우회선언에서 제기한 ‘전민족적인 정치투쟁’을 실천하지 못하자, 조선공산당은 “표명해야 할 선언이나 테제·행동강령 등에 의해 명백한 규정 및 선언할 내용을 보류”하고 있는 신간회의 조직형태를 재차 규정하였다.334)≪朝鮮日報≫, 1927년 12월 10일, 사설<新幹會의 京城大會>. 그 결과 1927년 10월경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역임한 안광천에 의해 신간회에 대한 인식은 ‘민족단일당의 매개형태’에서 ‘민족협동전선당의 매개형태’로 바뀌었다.335) 盧正煥,<新幹會와 그에 대한 任務>(≪朝鮮之光≫ 73, 1927년 11월호). 이는 신간회를 당적 조직과 협동전선으로 구별지으려는 인식이었다. 이렇듯 신간회의 조직형태에 대한 재규정과 논의가 제기된 것은 淸算論에 대한 대응책임과 동시에 지회설립으로 인한 조직 확대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활동이 없는 신간회에 단계별 활동지침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336) 신간회의 조직형태에 대해 조선공산당이 저지른 오류에 대해 韓偉健은 4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 신간회의 조직형태에 대한 불확실한 견해로 인해 ‘정당적 형태의 협동전선’을 결성하려 한 점, 둘째 이론적으로 노동계급이 이끄는 협동전선을 조직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노동자와 농민의 포섭과 동원과정 노력이 결여되었다는 점, 셋째 조직과정 자체를 투쟁과정으로 인식하지 못한 탓에 선조직 후투쟁 방식을 채택하였다는 점을 꼽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신간회의 조직과 인식체계에서 비롯되었다. 즉 신간회 조직이 중앙집권적 형태로 구성된 까닭에 노동자와 농민이 주체가 되지 못하여 전투조직이 수반되지 못했고, 투쟁강령에 따라 구체적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중에서도 가장 큰 결함은 당적조직형태였다.337) 鐵 岳,<大衆的戰鬪的協同戰線の結成と新幹會及び獨立促成會の任務>(≪朝鮮前衛黨當面の問題≫, 東京:左翼書房, 1930), 93∼94쪽.

 이와 같은 신간회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관계자들은 구체적 행동강령의 확립, 중앙집권제적 조직형태의 지회중심제로의 개편, 개인가입제의 단체가입제로의 전환 등을 구상하였다. 이에 앞서 신간회 각 지회에서도 1928년 2월의 1차 정기대회를 앞두고 정기대회에 제출할 정책안들을 결의하였다. 그것은 대개 ① 회장제에서 집행위원장제로의 변경, ② 지방(도)지회 연합기관의 설치, ③ 행동강령 제정, ④ 기관지 발간, ⑤ 단체가입제 실현 등이었다. 이 중 기관지 건을 제외한 4가지 안건은 모두 신간회의 조직체계를 개혁함으로써 신간회가 실천적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부분 지회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직체 변경안들은 대개 중앙본부에 대한 지회의 자율권 확대가 중심내용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바로 신간회를 아래로부터의 조직형태로 바꾸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 중에서도 단체가입제는 ‘조직문제’에 관한 논의의 핵심적 내용이었으며, 해소시까지도 해소 찬반론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쟁점이었다.338) 신간회는 정당적 조직이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전투적인 조직이 될 수 없었다고 지적되는 주요한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단체가입제가 실현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1927년 말에서 1928년 초에 이러한 문제는 각 지회와 사회운동자들 내부에서 제기되었고, 조선공산당은 최소한 1927년 10월경 종래 규정한 신간회의 ‘민족단일당의 매개형태’를 ‘민족협동전선당의 매개형태’로 변경·규정하였다. 그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신간회에 단체가입제를 실현시킬 것을 계획하였지만 1928년 2월의 검거로 무산되었다.

 이러한 ‘조직문제’에 관해서는 코민테른에서도 입장을 표명하였다. 제6회 코민테른대회(1928. 7. 17∼9. 10)에서 채택된<식민지·반식민지 제국에 있어서 혁명운동에 관한 테제>중 조선문제에 대한 언급에서 신간회의 정당적 조직형태를 부정하고 ‘협의체적 공동전선’을 요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신간회를 ‘민족협동전선의 매개형태’로 또다시 규정하였다. 이렇듯 신간회의 조직형태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은 지회와 조선공산당 그리고 코민테른에서 각각 일어났다.339) 이균영, 앞의 책, 270∼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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