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2. 신간회운동
  • 5) 신간회의 해소
  • (1) 신간회 해소론

(1) 신간회 해소론

 192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세력은 민족주의세력이 개량화되어 간다고 평가하면서 민족주의 고립화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세력은 민족주의세력과 상층연합에 근거한 정당형태의 통일전선방침을 폐기하고 대중투쟁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는 당면투쟁을 위한 임시적인 대중단체협의회 혹은 반제동맹 결성을 통한 하층 통일전선운동을 뜻하는 것이었다.343) 金明久,<코민테른의 對韓政策과 新幹會 1927∼1931>(≪新幹會硏究≫, 동녁, 1983).
신주백,<1930년대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의 전개과정>(≪역사와 현실≫2, 1989).
이애숙,<세계대공황기 사회주의진영의 전술 전환과 신간회 해소문제>(≪역사와 현실≫11, 1994).
이러한 변화는 주로 코민테른의<12월테제>와 프로핀테른의<9월테제>의 영향이었다.344) 朴慶植,<조선민족해방운동과 민족통일전선>(≪新幹會硏究≫, 동녁, 1983).
金明久, 앞의 글.
水野直樹,<코민테른의 민족통일전선론과 신간회운동>(≪역사비평≫2, 1988).
禹東秀,<1920년대말∼30년대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신국가건설론에 관한 연구>(≪한국사연구≫72, 1991).
林京錫,<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의 국가건설론>(≪大同文化硏究≫27, 1992).
<12월테제>에서는 식민지문제에서의 반제연합전선론의 의의가 그대로 계승되었으나<9월테제>에서는 신간회를 개량주의단체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9년 후반기부터 1930년까지는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해소문제가 논의되었다. 먼저, ML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이론가로 알려진 한위건은 1929년 12월 1일 天津에서 발간된≪理論鬪爭≫에 기고한 논설을 통하여 신간회에 대하여, “현재 조선의 공산주의운동 진영에서는 즉시해체론이 일부 일어나고 있는 등 신간회가 많은 결함을 띤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당의 조직역량이 대단히 미약한 현재 대중적·전투적 협동전선의 결성을 위해서 노동자·농민의 대중적·정치적 동원을 위해서, 또 지역적으로 합법적 대중조직의 협동통일을 위해서 당면에 있어서는 유력한 투쟁기관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즉 한위건은 신간회가 ‘어느 정도까지 매개 역할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었다.345) 鐵 岳,<大衆的戰鬪的協同戰線の結成と新幹會及び獨立促成會の任務>(≪朝鮮前衛黨當面の問題≫, 左翼書房, 1930), 92∼93쪽. 그러나 이러한 한위건의 입장은 이후 ML계 高景欽의 글을 통해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고경흠은 “현 조선의 민족부르주아지는<12월테제>에 명시된 대로 결코 제국주의 통치에 대해서도, 봉건적 유제에 대해서도 유력한 투쟁자가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며 가장 나은 경우에도 그들은 제국주의자에 대한 단지 개량주의적 반대파를 구상하는 데 머물 따름이다. 이 민족부르주아지의 혁명성 해소가 현 조선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트를 맹주로 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 나가게 한다”고 하였다.346) インタナシヨナル編輯部 編譯,≪朝鮮問題≫(전기사판, 1930년 4월 18일 발행), 8쪽. 이러한 인식 아래 고경흠은 신간회 지도부는 소부르주아정치가들이며 그들이 바로 “자치주의 투사들”347) 위의 책, 20∼21쪽.이라고 규정하여 이후 신간회 해소론의 논리적 필연성을 제고하였다.

 서울-상해계의 李雲赫은 “공산당은 신간회·천도교·형평사 등에 전위분자를 잠입시켜, 대중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막고 동시에 그 속에 들어 있는 대중들을 끌어내어 무산계급단체나 민족적 해방협동전선에 편입시키고 그 단체들은 해소해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348) 姜德相·梶村秀樹 編,≪現代史資料≫19, 314쪽. 그는 신간회 해소 후 협동전선은 “공산당이 제시한 당면의 반제·반봉건 슬로건을 행동강령으로 아래로부터의 대중참가에 의한, 신간회와 같은 단체의 내부에서가 아닌, 밖으로부터의 ‘노동운동협의회’·‘농민운동협의회’·‘청년운동협의회’ 등의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신간회를 해소시켜 대중들을 새로운 협의체적 협동전선의 구성단체들로 흡수시켜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세력이 통일전선전술이 달라지면서349)<12월테제>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해소된 직후 공산당 재건운동 이론자들 중에서도 韓偉健과 같이 신간회가 “어느 정도 매개적 역할이 가능하다”고 보거나, 林元根같이 신간회가 완전히 소부르주아지로 구성된 단체는 아니며 노동대중의 투쟁력을 말살하는 단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해소반대론을 펴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관내·만주에서 만들어진 민족유일당 준비조직은 해체되거나 민족주의자만의 단체로 개편되었다.350) 金喜坤,≪中國關內韓國獨立運動團體硏究≫(지식산업사, 1995).
盧景彩,≪韓國獨立黨硏究≫(신서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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