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2. 신간회운동
  • 5) 신간회의 해소
  • (2) 신간회지회의 해소운동

(2) 신간회지회의 해소운동

 신간회는 복대표대회 결과, 許憲집행부가 구성됨으로써 1928년 2월 이후부터 침체되어 왔던 신간회운동이 큰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甲山火田民事件을 비롯한 여러 활동은 일제에 의해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1929년 11월부터 1930년 3월까지 전개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학생들의 혁명운동이었지만 그 발생과 전개에는 신간회 및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신간회본부와 경성지회 간부들은 광주학생운동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이른바 민중대회를 계획하였다. 1929년 12월 13일로 계획된 민중대회는 사전에 발각되어 44명의 신간회 회원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신간회 지회를 중심으로 조선청년총동맹·근우회 등이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민중대회사건으로 신간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관련 간부들의 구속 외에도 지회의 많은 활동가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에서 신간회의 위상은 상승하였다. 1929년말 약 3만 7,000명이던 회원이 1930년 11월에는 3만 9,257명으로 증가한 상황은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민중대회’사건은 검거 이후 남은 신간회 본부 지도자들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이 구성된 신간회 집행부는 ‘온건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재정부장겸 회계인 김병로가 1930년 1월 서무부장과 조사부장을 겸직하게 됨으로써 신집행부는 사실상 김병로 집행위원장 대리체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때 일제에 의하여 파악된 김병로는 “종래의 신간회운동은 다만 관헌과 항쟁 대립하여 그 억압을 받아 하등 조선민족을 위하여 공헌한 것이 없음을 거울삼아 스스로 반성”351) 京畿道警察部,≪治安狀況≫(1931), 7·35쪽.하고, “종래 운동방침을 개혁하여 중앙간부를 데리고 천도교 최린 일파가 주장하는 자치운동과 협력하여 합법운동을 주장”352) 京畿道警察部,≪治安狀況≫(1931), 13쪽.하게 되었다. 김병로 체제의 이러한 방향전환은 신간회본부의 정책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김병로 체제의 신간회 정책은 우경화 혹은 온건화정책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신간회본부의 온건화경향에 대한 반발은 경성지회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성지회는 신간회 창립 당시 강령에 명시한 “타협주의를 배격한다”는 사실을 들어 신간회의 존립근거와 목표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이른바 박문희 사건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신간회본부측은 자파 중심으로 중앙조직을 정비하려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전국대회를 개최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신간회본부는 1930년 9월 중으로 전국대회를 대신한 복대표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경찰에 의해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신간회본부는 다시 11월 9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이것으로 전체대회를 대신하려 하였다. 대회 첫날인 11월 9일 온건파인 본부측은 합법운동단체들과 천도교 신파를 비롯한 자치운동단체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단체가입제를 채택하려고 하였으나 경성지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또한 대회에서 50명의 간부가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대체적으로 온건화노선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353) 이 대회에서 선임된 간부진은 다음과 같다.
중앙집행위원장:金炳魯
중앙집행위원:金湖(하동)·沈相玟(김천)·金昌容(나주)·金哲(金川)·朴源植(신의주)·具然達(청주)·李漢鳳(강릉)·崔相稷(해주)·姜基德(원산)·金昌權(청진)·宋斗煥(대구)·金時中(장성)·李廷鴻(순창)·宋秉赫(당진)·李德用(괴산)·李東壽(원주)·金元湖(재령)·金商圭(목포)·尹柱(함흥)·朱埰熙(주을)·宋洙格(정읍)·金士翼(북청)·朴台弘(진주)·申尙泰(칠곡)·黃尙奎(밀양)·尹秉球(주을)·李寬求(경성)·韓炳洛(정평)·郭尙勳(인천)·崔允鈺(평양)·金恒俊(신의주)·金容起(경성)·白寬洙(경성)·朴文熹(동래)·李正(진남포)·李周淵(단천)·金恒圭(경성)·姜相熙(경성)·李恒發(경성)·徐廷禧(경성)
중앙집행위원 후보:변희용·강인수·조영국·노석정·김귀동
검사위원장:양봉근
검사위원:유진태(경성)·현동원·노백용(김해)·박의양
(괄호 안 지역은 출신지가 아닌 지회임. 이균영, 앞의 책, 389쪽에서 재인용).

 대회 직후인 11월 19일 신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상정된 중앙상무집행위원회 위원과 각 부서책임자들은 다음과 같다.

중앙상무집행위원:李恒發·李寬求·徐廷禧·白寬洙·韓炳洛

회계겸 재정부장:金容起

서기겸 서무부장:金恒圭

조직부장:徐廷禧

조사부장:李恒發

출판부장:白寬洙

(이균영,≪신간회연구≫, 역사비평사, 1993).

 이 선출 간부들 중 사회주의자들인 이항발·박문희·이주연·한병락·서정희 등이 신간회의 온건화노선을 주도하였다. 대체로 이들은 서울청년회 계열의 인물들이었고, 이항발의 영향하에 있었다. 대체로 김병로 집행위원장 시기의 간부진은 前 신간회 간부, 물산장려회와 조선민흥회 간부, 그리고 조선청년총동맹내의 온건파, 서울청년회계가 조직적으로 진출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354) 이균영, 위의 책, 395쪽.

 신간회 경성지회는 1930년 12월 17일 열린 상무집행위원회에서 전체대회대행중앙집행위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경성지회는 그 결의문을 더 구체화시킨 이른바<通議文>을 작성하여 전국 지회에 발송하였다.355)≪조선일보≫, 1930년 12월 27일. 그것은 본부의 온건화운동으로서의 노선전환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경성지회의 본부에 대한 이러한 반발은 결코 신간회를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1930년 12월 30일 경성지회 상무집행위원회에서 신간회 해소운동에 반대성명 발표를 결정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신간회본부의 온건화노선은 이후 신간회 지회에서 해소운동이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신간회본부와 경성지회간의 갈등은 전국 각 지회의 커다란 관심사가 되었다.356) 安城(≪조선일보≫, 1931년 1월 23일), 咸興(≪동아일보≫, 1931년 1월 13일), 密陽(≪동아일보≫, 1931년 1월 27일), 江陵(≪조선일보≫, 1931년 1월 27일) 지회는 지회 차원에서 직접 본부와 경성지회의 갈등을 조사하기로 결정하였고, 마산지회는 진상조사를 위하여 검사위원장을 파견하기로 하였다(≪동아일보≫, 1931년 1월 31일). 원산·이원·통영·평양·길주·성진·부산지회357) 신간회 해소론을 처음 제기한 것은 부산지회였다. 등은 해소론을 토의하는 자리에서 전체대회대행중앙집행위원회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 위원회의 결과로 신간회는 “소부르주아 개량주의 영도하”에 있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외에도 해소론을 논의하는 거의 대부분의 지회가 본부의 온건화노선이나 전체대회대행중앙집행위원회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358) 이균영, 앞의 책, 397쪽.

 해소론자들은 “해소는 한 조직체의 해산을 뜻하는 해체와는 달리 한 운동에서 다른 형태의 운동으로 전환하는 변증법적 자기발전을 뜻하는 것”이라 하면서, 신간회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해소론자들의 주장은 ① 신간회 지도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전환된 점,359) 부산지회에서는 “본회의 근본정신인 비타협주의를 무시하고 합법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려는 민족개량주의가 발호해 온” 때문이라고 하였다. ② 신간회의 조직형태가 정당적 형태로 되어 있다는 점,360) 단천지회에서는 “조직의 중요한 모순과 소부르주아적 지도로 인하여 하등의 적극적 투쟁도 못하고, 그 안의 노동대중의 투쟁의욕을 말살하여 객관적으로 필요한 계급적 대진출을 방해하는데 이르렀다”고 하였다. ③ 신간회의 강령이 추상적이며 구체적 운동지침이 없다는 점,361) 평양지회에서는 “행동강령도 없는 신간회의 현재 강령만으로는 오히려 투쟁의식을 말살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④ 객관적 정세변화에 따라 주체적 조응조건이 변했다는 점 등이었다. 여기서 언급하는 객관적 정세변화란 세계공황이 일어나고 일본이 만주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을 말하며, 주체적 조응조건이란 이 무렵에 나타나는 노동대중의 전투화·혁명화 현상이 진전됨을 말하는 것이었다.

 해소론을 주장하는 지회와 달리 원산·신의주·마산·함흥·밀양·양산 지회는 해소반대를 결의하였다.362) 이균영, 앞의 책, 518쪽. 이들은 지금은 해소시기가 아니라고 하거나(양산지회), 해소에는 찬성하지만 해소의 이론적 당위성보다는 노동·농민운동의 강화를 통해 그것에 접근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러한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해소론은 관념적 해소론이라고 주장하였다(원산·함흥지회). 민족주의자 가운데 가장 선명한 해소반대론을 펼친 안재홍은 “조선과 같이 근대 累세기에 그 민족의식이 침체 萎微하였던 인민은 그 자신이 민족적 정조의식에 浸潤 昻揚되는 민족소부르주아적 혹은 자본주의적 의식인 관념운동의 과정조차 아직도 지속할 것을 역사적 과제로 가지고 있다. 하물며 조선의 운동은 兩個 진영의 병렬협동이 가장 동지적 지속을 하여야 할 정세 하에 있고 둘이서 서로 대립 배격할 정세를 가지지 않았다”고 하였다.363) 安在鴻,<해소하에게 與함>(≪批判≫7·8합집, 1931), 32쪽.

 안재홍은 해소론을 “공연히 남의 본을 받아 가지고 日本勞動黨 해소론에서 용어와 이론을 빌려온 直譯的 국제연장주의”라고 비난했다.364) 安在鴻,<解消論 冷眼觀-非國際延長主義>(≪조선일보≫, 1930년 12월 26일, 사설).

 신간회의 해소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그것은 조정될 수 없었고 결국은 조직대결로 치달았다. 1931년 5월 15일,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신간회 제2회 전체대회가 열렸다. 1927년 신간회 창립대회 후 처음 열리는 전체대회이자 동시에 해소대회였다. 대회 첫날, 대회에 파견된 대의원 총수는 80명이었다. 대회 이틀째 방치규·최천·조열·김창윤·한홍정 5인을 전형위원으로 하는 임시집행부가 선임되었다. 의장 李晃, 부의장 한홍정, 서기장 尹基鼎, 서기 朴恭根·尹永均, 사찰 崔浩讚·金采龍·朴哲煥·金斗煥·玄益謙이 선임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해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365)≪조선일보≫, 1931년 5월 17일. 이날 36명의 중앙간부진이 선임되었고366)≪조선일보≫·≪동아일보≫, 1931년 5월 18일. 드디어 해소안이 제출되었다. 경찰의 제지로 찬반토의는 금지되었다. 경성지회 대의원인 김혁의 동의와 林和의 재청으로 거수표결에 부친 결과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해소안이 가결되었다.367)≪동아일보≫, 1931년 5월 18일. 해소대회에서 해소론 쪽으로 분위기를 선동·유도한 것은 카프조직으로 알려져 있다.368)≪조선일보≫, 1931년 10월 6일.
安漠,<朝鮮プロレタリア藝術運動史>(朴慶植 編,≪朝鮮問題硏究叢書≫7권, アシア問題硏究所, 1982).
해소파들은 해소의 변을 신간회의 조직적 결함을 극복한 다른 조직체를 지향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신간회 해소 결의 이후 모든 집회가 금지됨으써 결국 신간회 해소는 해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安建鎬>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