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1. 농민운동
  • 2) 일제의 농업정책과 한국 농민의 처지

2) 일제의 농업정책과 한국 농민의 처지

 모든 운동은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일제시기 농민운동도 마찬가지이다. 농민의 주체적 역량, 즉 농민의식의 성장과 그에 기초한 운동조직이 농민운동을 이끌어 갔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의 식민농업정책과 그에 따른 생활상의 문제인 객관적 조건이 농민대중을 운동전선으로 내몰았다.

 일제는 1910년대 조선토지조사사업,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반에 걸친 산미증식계획, 1930년대 중반의 농촌진흥운동,371) 지수걸,<1932∼1935년간의 조선농촌진흥운동>(≪한국사연구≫46, 1984). 이후의 조선증미계획372) 최유리,<일제말기 ‘조선증미계획’에 대한 연구>(≪한국사연구≫61·62, 1988). 등의 식민농업정책을 실시하였다. 이같은 농업정책의 기조는 식민지 지주제의 형성과 그를 통한 농업수탈의 감행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제는 미증유의 산업발전을 이루었지만, 1918년 종전과 함께 불어닥친 경제불황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미가폭등으로 일본 각지에서 미곡소동이 일어나는 등 극도의 식량위기에 빠졌다. 이에 일본 내의 유휴자본을 한국에 투입함으로써 경제불황을 해소하고, 또 공업화에 따르는 식량부족 현상을 타개하려는 목적으로 시행한 것이 산미증식계획이었다.373) 신용하,<식량의 증산과 약탈>(≪한국사≫21, 국사편찬위원회, 1976).
河合和男,≪朝鮮における産米增殖計劃≫(未來社, 1986).

 일제가 한국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식량난을 해소하려고 한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그것은 식민통치권력을 이용하여 산미증식계획을 강제로 시행할 수 있고, 또 한국농민을 부역의 형태로 동원함으로써 투자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산미증식계획의 기본목표는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에 의한 미곡 증식과 그 증식미의 일본 반출이었다. 그러나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시행된 제1차 산미증식계획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이유는 민간자본 유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시기 일본의 산업자본은 산미증식계획과 같은 장기투자보다는 주로 경공업과 식료품 공업에 투입되었고, 한국인·일본인 지주의 자본도 토지개량보다는 농지를 더 구입하는 데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는 농지소유 수익이 토지개량이나 농사개량의 투자수익보다 높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26년부터 官 주도의 제2차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갔다. 제2차 산미증식계획의 특징은 제1차에 비하여 사업자금 면에서 지주·자본가의 자금, 즉 민간자본의 비중이 42%에서 12%로 대폭 경감된 점에 있었다. 이는 민간자본 유치에 실패한 일제가 관 주도로 제2차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한 것이고, 또 그 만큼 식민주의적 성격도 강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산미증식계획의 추진기구로 일제는 1920년 11월 조선총독부 식산국에 토지개량과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1926년 제2차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면서부터는 수리과와 개간과를 더 두었다. 이와 함께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토지개량부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또 조선식산은행 산하에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를 창설하여 토지개량사업을 담당케 하였다. 1927년 5월에는 식산국의 토지개량과·수리과·개간과를 통합하여 토지개량부를 창설하고, 이를 식산국에서 독립시켜 조선총독부 직속 관청으로 만들어 산미증식계획을 총괄하여 갔다.

 이들 기관이 주로 산미증식계획 가운데 토지개량 사업을 맡았다면, 농사개량 사업은 주로 조선농회가 담당하였다.374) 김용달,<朝鮮農會의 계통체제 수립과 초기사업(1926∼1932)>(≪한국근현대사연구≫4, 1996). 일제는 3·1운동 이후 농촌·농민통제의 강화와 제1차 산미증식계획의 지원을 위해 1920년대 초반부터 郡·島농회와 그 상위 조직으로 道농회를 설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에 들어와 소작쟁의가 발생하여 점차 일반적 현상으로 확산되어 갔다. 또 1922년 10월 朝鮮勞動聯盟會와 1924년 4월 朝鮮勞農總同盟의 결성 등 사회주의계열의 농민운동단체, 비록 개량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1925년 10월 천도교계열의 朝鮮農民社 등이 여러 농민계층을 조직화하면서 전국적이며 계통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하여 군·島농회와 도농회, 그리고 ‘任意’ 조선농회·지주회 등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농사개량사업에 대한 이들 단체의 기여는 매우 미약하여 제1차 산미증식계획에서 예기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따라서 일제는 제2차 산미증식계획을 계획하면서 고양되는 농민운동에 대처하고, 산미증식계획에 대한 농민대중의 참여와 협조를 유도하기 위해 일사불란한 농민통제체제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농민운동에 의해 도전받는 식민지 지주제의 안정과 확대 재생산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 방향은 일본의 제국농회체제를 모방하여 기존의 도농회와 군·島농회 체제를 확대·정비하여 계통적인 조선농회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 4월 제정·공포된 일본의<농회법>을 모법으로 하여 1926년 1월<조선농회령>과<조선농회령시행규칙>을 제정·반포하고, 그에 의거하여 기존의 농업단체들을 통폐합시켰다. 그럼으로써 ‘군·島농회(1926. 6)→道농회(1926. 10)→조선농회(1927. 3)’로 계선화된 조선농회 계통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농회가 산미증식계획에서 농사개량사업을 담당하면서 농사개량, 저리 자금의 알선·융자 및 회수 사무 등을 맡았던 것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산미증식계획의 양대 사업은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이었다. 특히 토지개량은 산미증식계획의 기축이고, 일제가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었다. 일제가 계획한 토지개량사업의 목표는 35만 정보이고, 사업비는 2억 8,000만원으로 총예산의 88%에 달하고 있었다. 또 토지개량에 의한 산미의 증식 계획량은 472만 석으로 총계획량 가운데 58%를 차지하였다.

 토지개량 사업 자금은 조선총독부의 보조금과 일본정부 알선 자금이 주류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일본정부 알선 자금의 비중이 가장 높은데, 그 운용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이 각각 반액씩 관장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관장한 자금은 자체 토지개량부를 통하여, 또 조선식산은행이 관장한 자금은 그 산하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를 통하여 집행되었다.

 실제 토지개량사업의 추진 상황은 1926년에서 1928년까지는 계획량을 웃돌고 있었으나, 1929년을 고비로 급격히 하락한다. 이는 1929년 세계대공황의 영향으로 일본정부의 알선 자금이 급격히 줄어들고, 또 일본 국내의 미가가 하락하면서 산미증식계획을 중지하라는 요구가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토지개량사업의 시행기구도 점차 폐지되기 시작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개량부는 1931년, 조선총독부의 토지개량부는 1932년에 폐지되었고, 1934년에는 토지개량사업이 중지되면서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농사개량사업은 제1차 산미증식계획에서는 그 자금을 지주와 자작농에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제2차 산미증식계획에서는 4,000만원의 예산을 따로 책정하여 실시하였다. 주로 조선농회를 중심으로 소위 ‘우량품종’의 보급, 화학비료 사용의 확대, 퇴비 등 자급비료의 장려를 강제하면서 추진되었다. 농사개량사업은 세계대공황 이후 토지개량사업이 중지됨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이 사업이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 뿐 더러 그 시행효과가 컸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에 의한 생산량의 증대를 빙자하여 미곡의 본격적인 수탈에 나섰다. 이는 산미증식계획의 목적이 한국 미곡의 수탈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산미증식계획 기간에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으로 미곡의 단위당 수확량과 연평균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연평균 생산량은 1915∼1917년 평균 13,106,446석에서 1925∼1927년 평균 15,790,898석으로 17% 정도, 단보당 수확량은 1915∼1917년 평균 0.89석에서 1925∼1927년 평균 0.99석으로 11% 정도 증가하였다. 이에 비하여 미곡의 대일 반출량은 1915∼1917년 평균 1,573,503석에서 1925∼1927년 평균 5,658,902석으로 무려 360% 증가하고 있다. 수확량은 산술적으로 증가한 반면에 반출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더구나 연평균 미곡생산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1917∼1921년 평균 0.68석에서 1927∼1931년 평균 0.49석으로 감소하였다. 이는 분명 한국 농민의 식량을 약탈하여 일본인들의 배를 채우는 제국주의 식량수탈정책의 표본이었고, 또한 일본의 선진 공업화를 위한 저미가 정책의 희생양이 한국 농민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시행된 토지개량사업은 대지주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수리조합 설치비용을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심지어 소작농민들에게까지 전가함으로써 이들의 경제적 몰락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1920년대 농민층은 아래<표 1>과 같이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화전민으로 하층분해되어 갔다.

연 도 지주 자작농 자소작농 소작농 화전민
1920 3.5 19.4 37.4 39.8  
1921 3.6 19.6 36.6 40.2  
1922 3.6 19.7 35.9 40.8  
1923 3.7 19.5 35.2 41.6  
1924 3.8 19.4 34.6 42.2  
1925 3.7 19.9 33.2 43.2  
1926 3.8 19.1 32.4 43.3 1.3
1927 3.8 18.7 32.7 43.8 1.0
1928 3.7 18.3 31.9 44.9 1.2
1929 3.8 18.0 31.4 45.6 1.2
1930 3.6 17.6 31.0 46.5 1.3

<표 1>1920년대 농민층의 하층 분해 상황 (단위 : %)

*朝鮮總督府 編,≪朝鮮ノ小作慣行≫下(1932), 74∼75쪽.

 소작농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지주의 고율소작료 부과와 마름의 횡포였다. 소작인은 지주의 지시에 따라 소작계약서를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소작계약서에는 소작료의 납입방법과 기준, 계약기간 설정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소작인이 부담해야 할 소작료는 地代와 토지개량비, 영농에 필요한 자재비, 공과금을 포함한 것이다. 그밖에도 소작인들은 소작료 운반비와 종자대·수리조합비·비료대까지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수리조합 구역 내에서는 수확량의 7∼8할까지도 소작료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한 소작지 관리인으로 농민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소작계약 체결권을 악용하여 소작인들의 경작권을 위협했고, 소작료를 증액하며, 소작인들의 선물증여 등 물품공세 여부에 따라 소작권을 이동하는 등 각종 폐해를 자행하였다. 그 외에도 소작인에게서 받는 소작료와 지주에게 납부하는 소작료 사이의 차액을 가로채고, 추수 종사원들의 접대비를 소작인에게 전가시키며, 소작인에게 금전이나 곡물을 고리대로 빌려주거나 물자를 고가로 팔아 폭리를 취하는 등 횡포는 끝이 없었다.

 따라서 1920년대 농촌은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수리조합 건설비의 부담과 고율 소작료 등으로 농민층은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갔고, 거기에 더한 마름의 횡포로 인해 소작농민의 궁핍화는 만연되어 絶糧 농가가 속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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