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1. 농민운동
  • 3) 농민운동 조직의 발전

3) 농민운동 조직의 발전

 1920년대 지속성과 투쟁성을 견지한 농민운동의 주체적 역량은 자체 조직력이라 할 수 있다. 즉 한국 농민은 일제의 식민농업정책에 대항하여 민족적·계급적 각성을 이루어 가며 운동조직을 결성하고, 또 그것을 발전시켜 가면서 농민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한말과 일제 초기에도 소작회·소작인회 등의 단체가 있었으나 주체적인 농민조직은 3·1운동 이후 농민운동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탄생하였다. 농민대중이 자신의 권익과 민족적 이익을 위해 농민운동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3·1운동 이후 농민들은 里·面 단위의 소작인조합·소작조합·농민공제회·작인동맹 등의 농민단체를 결성하여 갔다. 총독부의 자료에 따르면 농민단체 수는 1921년 3개, 1922년 23개, 1923년 107개, 1924년 112개, 1925년 126개, 1926년 119개, 1927년 160개, 1928년 307개, 1929년 564개, 1930년 943개로 나타난다. 특히 1922년 7월<소작인은 단결하라>는 조선노동공제회의 농민문제 선언 발표, 그리고 토지혁명론을 공식적으로 제시한 코민테른(Comintern)의 1928년<12월테제>는 농민단체 결성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는 농민운동이 사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창기 소작인조합은 자체규약 내지는 회원규정도 명확하지 않은 유치한 형태의 자연발생적 조직이었다. 또한 소작농민과 임금노동자의 구분이 모호하여 조선노동공제회나 조선노동대회 등의 노동단체가 농민운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저급한 공업화로 인하여 식민지 사회가 미분화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대응하기 위한 통일적인 조직체계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농민단체의 조직형태도 강화되었다. 1923년부터 소작인조합이 면 단위의 한계성을 극복하여 군 단위의 연합체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소작인조합의 구성을 보면 초기에는 조합원은 소작농인데, 지도부는 흔히 지주 또는 지주출신의 인텔리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소작인조합의 활동도 대개 소작계약개선·농사개량·생활개선·계몽활동 등 개량적인 것들이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 시기 소작인조합의 대지주에 대한 요구사항은 소작료 4할제 실시, 소작권의 보장, 지세·공과금의 지주부담, 부정한 마름의 배척 등이었다. 따라서 소작농민들의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 조직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주와의 투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소작인조합의 이러한 한계성 때문이었다. 즉 지주 출신 지도부의 개량주의적 해결책은 조합원의 계급적·민족적 요구와는 거리가 있었던 탓이다.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하고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에 조응하려는 움직임으로 1920년대 후반기 농민운동 조직의 변화가 일어났다. 1924년 4월 노농단체들은 운동역량을 집중하고 통일시키려는 전초작업으로 전국적인 노농운동 조직으로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노농총동맹의 창립과정에는 전조선노농대회·남선노농동맹·조선노동연맹회 등 182개 단체가 참여하였고, 창립대회 출석자만도 167개 단체의 대표 204명이나 되었다. 이같은 조선노농총동맹의 창립은 조선노동공제회의 해체 이후 전국단위의 운동조직을 건설하려는 사회주의자들과 노농대중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창립대회 직후 조선노농총동맹은 임시대회에서 강령초안과 노동문제·소작문제 등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강령초안은 “吾人은 노농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의 실현을 목적한다. 오인은 단결의 위력으로서 최후의 승리를 얻는 데까지 철저히 자본계급과 투쟁한다. 오인은 노농계급의 현생활에 비추어 복리증진 및 경제적 향상을 도모한다” 등이었다. 노농계급의 해방을 표방하는 사회주의 이념이 짙게 투영된 조선노농총동맹의 강령은 이후 노농운동조직의 발전은 물론 노농운동의 민족해방운동적 성격을 고양시켜 간 원동력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 농민운동 조직은 제2차 산미증식계획에 의해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등의 계급적 몰락이 현재화하고, 사회주의의 방향전환론이 본격적으로 채택되면서 변화하여 갔다. 중앙조직인 조선노농총동맹은 조선노동총연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화·분립되었으며, 소작인조합은 자작농층을 포함한 농민조합으로 개편되기 시작한 것이다. 1926년 전남 務安농민연합회가 무안농민조합으로, 岩泰소작회가 암태농민조합으로 발전하면서 그 물결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중앙의 조선노농총동맹도 농민·노동 운동의 발전으로 각각의 단일적인 조직체가 필요하게 되자, 1926년 12월 발전적 해체를 결의하면서 노농운동의 신정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첫째 노농운동 조직은 경제투쟁을 위주로 한 대중적 조합운동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운동은 소수 선각분자의 사상운동 조직에 불과했다는 것, 둘째 노동자와 농민은 본래 계급적 차별성이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한 조합 내에 혼합하여 운동의 발전을 저해하였으므로 앞으로는 分盟한 뒤 두 동맹 사이의 협의기관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 셋째 종래에는 정치투쟁을 부정해왔으나 차후에는 노농대중의 정치의식을 향상시켜 적극적인 정치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의 신정책은 이해관계가 상이한 노동·농민운동의 공동투쟁에 대한 한계성을 지적하고 대중성 확보와 정치투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기류에 따라 조선노농총동맹은 1927년 9월에 書面대회를 통하여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분립하였다. 조선농민총동맹은 소작인단체는 각 지방에서 면을 본위로 하여 군·면 연합회를 두고 지방 소작인 상황을 조사하며, 소작운동의 本旨와 배치되는 異流 소작단체에 대하여 그것을 파괴하고, 소작료는 3할로 할 것, 지세와 공과금을 지주가 부담할 것,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민의 폐지 등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농민총동맹의 등장은 조직체의 운영방법이 성숙된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전문적인 농민운동의 전국적 지도기관으로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농민총동맹은 일제의 탄압으로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농민운동은 각지의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신간회 지방지회 등과 연계하여 전개되어 갔다. 나아가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농민조합은 혁명적 농민조합으로 개편되기 시작하였다.375) 지수걸,<일제하 농민운동 연구의 현단계와 과제>(≪한국사론≫26, 국사편찬위원회, 1996). 혁명적 농민조합은 농민의 경제적 이익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적 지도 아래 토지혁명을 비롯한 민족혁명의 주요 과제를 해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경제대공황 이후 강화된 일제의 파쇼적 탄압에 대응한 빈농 중심의 농민운동 조직으로 사회주의자의 黨재건 운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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