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1) 노동운동 전개의 배경
  • (1) 노동자계급의 상태

(1) 노동자계급의 상태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식민지 수탈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일본제국주의는 192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 자본 축적을 위하여<회사령>을 철폐하고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식민지 조선을 원료공급지, 일본 공업제품의 판매시장, 값싼 노동력 시장 등으로 만들어 갔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의 결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확대되어 가는 동시에 노동자계급도 양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28년 7월 말 현재 전체 노동자수는 약 120만 명이었고, 공업노동자수는 1920년에 5만 5,000여 명에서 1929년에는 9만여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산업별로 노동자 구성을 보면 1929년의 11개 공업부문의 노동자들 중에서는 식료품공업 노동자가 2만 7,000여 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방직공업 노동자가 1만 8,000여 명, 화학공업 노동자가 1만여 명 이상이었다. 광산노동자는 1924년에 1만 8,000여 명에서 1929년 2만 9,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부두노동자는 1929년 초에 약 1만 명에서 1929년에는 2만 5,000여 명으로 증가했고, 토목건축노동자는 1928년에 42만여 명, 도시잡업 노동자가 65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산업별 노동자 구성에서 막벌이꾼·지게꾼·토공 등으로 불리는 일용노동자들은 수적으로는 훨씬 우세했지만, 그 분산성·미숙련성 등으로 말미암아 집단적 행동을 취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는 다르게 공장노동자·광산노동자와 부두노동자 등의 운수부문 노동자들은 같은 직장에서 장기적으로 복무하며, 기능적으로도 숙련을 요하는 부문이 많았으므로 기업주들이 마음대로 다른 노동자들로 대체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근대적인 산업노동자의 증가가 1920년대 노동운동을 발전시킨 객관적 기반의 하나가 되었다.385) 한국노동조합총동맹,≪한국노동조합운동사≫(1979), 35쪽.

 1928년 7월 말 전체노동자 약 120만 명 가운데서 민족별 구성을 보면 조선인 노동자수는 95.8%, 일본인 노동자수는 1.8%, 중국인 노동자수는 2.2% 등이었다. 1929년의 8만 3,000여 명의 공장노동자의 성별 구성을 보면 남자노동자는 전체의 68%, 여자노동자는 전체의 32%였다. 공장노동자의 연령별 구성을 보면 16세 이하의 소년공이 2,326명, 소녀공이 6,241명, 16세 이상 50세 이하의 노동자는 남자 47,927명, 여자 19,473명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자본주의적 경제정책을 실시한 이래 계속해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지수는 하락했다. 1920년대의 경우에도 1920년도를 100으로 할 경우 1929년도에는 83으로 실질임금 지수가 떨어졌다. 저임금정책은 장시간 노동 강요와 함께 자본축적의 확실한 기제였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민족별, 성별, 연령별, 직종별, 산업부문별, 지역별, 공장규모별, 학력별, 근속연도별, 최저·최고임금별 등으로 차이가 났다. 이 중에서 민족별, 성별, 연령별, 최저·최고임금별로 평균 임금구성을 보면, 1929년 현재 조선인 남녀노동자는 일본인 남녀노동자의 50% 정도, 여성노동자는 남자노동자의 50% 정도, 유년노동자는 성년노동자의 50% 내외, 최저임금은 최고임금의 약 35%에서 64% 정도였다.

 1930년 현재 공장노동자의 노동시간은 8시간 이내가 0.8%, 10시간 이상이 32.2%, 12시간 이상이 46.9%였다. 물론 공업부문별·민족별로 노동시간의 차이가 있었다. 광산노동자들은 77.4%가 1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했다. 일본노동자의 경우 12시간 이상은 0.3%, 8시간 미만은 1.4%, 10시간 이상은 43.6%였다.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50%에 불과했으면서도 일본인 노동자보다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렇게 일본제국주의는 자본의 무한한 증대를 위해 노동자들을 산업별·공업부문별·민족별·성별·연령별 등으로 분할하고 다시 여기에다가 임금구조별로·노동시간별로 분할하여 노동자들끼리 상호경쟁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더욱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이러한 노동조건 하에서 노동자들의 재해나 사고율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1924년을 100으로 할 때 사고회수 및 그 지수·사망인원수·중상자수·경상자수가 계속 증가했다. 특히 광산노동자의 경우 1924년의 경우 재해나 사고율이 0.078이었던 것이 1929년에는 0.103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일제하의 광산경영자는 노동안전시설을 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보다 조선인의 생명의 값이 훨씬 더 싸게 먹힌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다만 잉여노동을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필요노동 내지 생명까지도 단축시키면서 노동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있었다.386) 한국노동조합총동맹, 위의 책, 42∼43쪽. 일본제국주의 자본가들의 자본축적 욕망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생명이나 건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노동하는 기계나 동물로 바라보았지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여기에다가 일본제국주의 국가권력도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노동조건을 개선하여 줄 어떠한 정치적·법률적·제도적 권리를 강구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전기간에 걸쳐 노동자들을 자본가들의 야만적인 억압과 착취로부터 보호하여 줄 최소한의 노동관계법도 실시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있었다. 일제는 오히려 1925년에<치안유지법>이라는 악법을 만들어 노동자계급의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존권 요구조차도 폭압으로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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