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2) 노동조합의 조직
  • (1) 전국적 노동조합

가. 조선노동공제회

 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최초로 전국적이고 대중적인 노동자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선진적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노동공제회는<창립취지문>에서 노동공제회의 목적은 “自力으로써 自我가 衣食하는 동시에 애정으로써 상호부조 하여 생활의 안정을 圖하며 공동의 存榮을 기함”에 있다고 선언했다.390)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30쪽. 노동공제회는 ‘노동사회의 조직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으로 ① 지식을 계발할 것, ② 품성을 향상시킬 것, ③ 저축근검을 장려할 것, ④ 민중위생을 장려할 것, ⑤ 환난을 구제할 것, ⑥ 직업을 소개할 것, ⑦ 기타 일반노동상황을 조사할 것, ⑧ 기관지≪共濟≫를 발행하여 일반 노동문화를 보급할 것 등을 내세웠다.391) 김윤환,≪한국노동운동사-일제하편-≫1(청사, 1982), 113쪽. 그러나 노동공제회는 노동자들의 절실한 일상적 요구들을 당면한 투쟁과업으로 제기하지 못했으며 노동자계급의 단결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노동공제회에 가입하는 방식은 단체회원제가 아니라 개인회원제였다. 그리고 조직의 운영방식은 창립 당시에는 회장제를 채택했지만 이듬해 1921년 4월 집행위원제로 변경했다. 여기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주로 신문배달부·인력거부·지게꾼 등의 자유노동자들과 정미공·인쇄공·연초공장 직공 등의 공장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지방지회에는 소작농민들도 적지 않게 망라되었다. 이는 당시의 노동운동가들이 소작농민을 노동자와 동일시하여 그들 간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와 농민 간의 역사적·사회적인 지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여 피착취 무산대중이라는 일반개념 속에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해소해 버렸다. 이는 당시 노동자계급의 성장이 유치했음을 반영했다.

 당시 노동자계급의 대부분은 대체로 파산된 농민 출신이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로 된 다음에도 농민들과 일종의 자연적인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1920년대 초부터 노동자와 농민들 간에는 의식적이며 조직적인 노농동맹은 형성하지 못했으나 자연발생적으로 서로 단합된 공동투쟁을 전개하게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농민들이 함께 노동공제회에 들어갔다.

 노동공제회는 그 목적 및 구성원에서 일련의 제한성들을 내포하고 있어서 계급의식적인 노동자 조직으로는 활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동공제회는 창립 초기부터 노동자들을 결속하기 위한 조직사업을 광범하게 진행했다. 그리하여 조직 당시에 678명에 지나지 않았던 회원이 1921년 3월에 와서는 1만 7,259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또한 이 무렵에 노동공제회는 전국의 산업 중심지들, 즉 평양·대구·안악·개성·혜산·정읍·황주·군산·북청·신창·신천·광주·안주·영흥·안동·인천·영주·강화·양양·고산·청진·진주·경주 등에 지방지회들을 가지게 되었다.392) 김인걸, 강현욱, 앞의 책, 33쪽.

 노동공제회는 소작인들을 단합하기 위한 조직사업도 추진시켰다. 예를 들면 1922년 노동공제회 진주지회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소작인대회’를 소집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각지에서 소작인들의 결속과 대중적 투쟁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노동공제회는 노동야학 등을 설치하고 기관지≪공제≫를 발간하여 노동자들에 대한 계몽활동을 주로 벌였다. 노동공제회는 민족주의·사회주의 등 다양한 이념을 지니고 출발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주의적 경향의 색채가 강화되어 갔다. 그것은 노동공제회의 기관지≪공제≫에 실린 논설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393) 윤여덕,≪한국초기노동운동연구≫(일조각, 1991), 96쪽.

 ≪공제≫창간호의<卷頭一聲>에서는 노동자들의 모든 불행의 근원은 불합리한 현 사회제도에 있다고 폭로했고,<전국 노동자제군에게 檄을 送하노라>에서는 노동은 상품이 아니며 금전으로서 매매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하에서의 노동자들의 참혹한 처지와 그 제도의 실상을 폭로했다.394)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34∼35쪽. 이어서≪공제≫2호에 실린<노동운동의 사회주의적 고찰>은 계급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고취했고,≪공제≫7호에는<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의 개요>를 소개했다.395) 김인걸·강현욱, 위의 책, 36쪽.

 이렇게 하여 초기에 상호부조와 계몽적인 성격의 색채로 출발했던 노동공제회 내부의 사회주의자들의 활약에 의하여 점차로 참된 노동자계급의 조직으로 변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 갔다.396) 윤여덕, 앞의 책, 97쪽. 즉 노동공제회는 본격적인 근대적 노동조합 운동을 준비한 노동자조직으로서 노동운동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397)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37쪽.

 그러나 1922년 “노동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운동이므로 진정한 육체노동자에게 맡기라”는 노동자 대중의 요구가 제기되는 가운데서 노동공제회 내부에 할거하고 있던 개량주의자 또는 노자협조주의자에 대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간부 윤덕병 등이 “사상상 또 행동상 동일보조를 취할 수 없는 분자를 노동운동의 대열에서 제거해야 되겠다”는 의도로 1922년 10월 15일 노동공제회의 해산을 결의했다.398) 김윤환, 앞의 책, 115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