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5) 노동조합의 작업부와 생산조합의 조직

5) 노동조합의 작업부와 생산조합의 조직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작업부나 생산조합을 조직·운영했던 사례들이 있었다. 특히 양화나 양복 등의 수공업적 노동조합들에서 작업부를 설치하여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의 경우 1920년대 초에 양화직공들은 실비제작소라는 양화직공조합 작업부를, 1930년 말 영업 부진을 이유로 해고된 양화직공 30여 명은 이듬해 2월에 양화직공 작업부를, 1932년에는 양복기공조합에서 작업부를 설치·운영했다. 이들의 경우 작업부 설치 동기의 하나는 조합운영과 조합원 복지를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파업의 결과 해고되거나 뚜렷한 해결의 전망이 없이 지구전을 계속하는 경우 노동자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부산의 경우 인쇄직공조합의 파업과정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1926년 5월 작업부 설치를 계획했고, 1930년 4월 양화직공조합에서 임시대회를 열고 작업부 설치를 결의한 후 10월 말에 실업조합원을 구제하기 위해 전주에 양화공조합 작업부의 지부를 설치했다. 대구에서는 1925년 12월 노동친목회에서 조합활동의 일환으로 조합의 재정을 뒷받침하고 실업자의 구제를 위해 작업부를 설치했다. 1927년 12월에 재봉직공조합에서도 임시총회를 열고 실업자 구제를 위해 작업부 설치를 결의했다. 그 운영방식은 현재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에게 배분된 일감을 현직과 실직자 전원에게 동일 배분하여 공동작업을 했고, 실직상태에서 다시 복직된 경우에는 본봉의 4%를 매월 의무적으로 조합에 납입하여 실직자 구제자금으로 충당하려고 했다. 또한 노동조합의 작업부 설치 취지에는 자본가의 이윤이나 혹은 청부업자의 중간착취를 배제하고 소비자에게 직접 상품을 공급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노동조합이 주관해 생산조합이나 작업부를 설치·운영했던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평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작업부나 생산조합을 계획·설치한 직종은 인쇄·양복·재봉·금은세공·면옥·월자 등이었다. 설치 목적은 서울·부산·대구의 경우와 비슷했다. 그리고 파업을 계기로 작업부를 설치했다. 그러면 고무노동자들의 생산조합운동 사례를 보자.

 1930년 8월의 고무공장 총파업에서 고무노동자들은 30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배했다. 이들은 생계와 고용을 위해 자신들의 힘으로 직접 공장을 건설해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9월 14일 이들은 공장설치 창립회의를 열고 공장명칭을 ‘공제고무공업조합’으로 하고 총자본금은 10만원, 1구좌에 10원씩으로 발기인 60여 명이 2만 5,000원을 모아 일시 불입하기로 했다. 이 운동에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평양의 일부 노동운동가와 유지자산가들도 참여했다.

 이렇게 현금 2만원을 모금해서 시작한 노동자들의 고무공장건설운동의 이념적 지향은 ‘현재 고용주 측이 제정한 모든 제도를 깨뜨려버리고’ 8시간 노동제와 이익의 평균분배 등을 지향했다. 공장설립 취지로는 ① 생산기관의 사회화, ② 노동생활의 합리화, ③ 이윤분배의 균등화라는 3원칙을 내걸었다. 그리고 부대사업으로 일용소비품 구입 분배, 의료기관 설치, 탁아소 설치, 숙박소·식당 설치, 욕장·이발소 설치, 오락·수양기관 설치 등을 계획했다. 이와 아울러 주식수의 여하를 불문하고 의결권에서는 권리가 동등하다는 원칙도 명시했다. 공제고무공업조합은 당시 노동자들의 꿈과 이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고무공장건설에 참여했던 한 노동자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조선의 모든 기업이 자본주의 독점사업으로서 그들의 이익을 본위로 한 것이요 직접 생산자인 무산노동자는 오직 아사를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점에서 자본주의를 본위로 한 오늘날의 제도 앞에서 우선 몇백 명이라도 구해내어 노동자 자신을 본위로 한 공장을 설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우리는 전조선 소비조합과 모든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그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생산기관으로서 진력코자 한다(≪동아일보≫, 1930년 10월 8일).

 이 공제고무공업조합은 1934년 무렵까지 지탱했다. 그러나 자본의 결핍, 판로 문제 등으로 장기 지속될 수 없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이상인 노동생활의 합리화나 이윤분배의 균등화 등도 실현되지 않았고, 의료기관·탁아소·수양기관 등도 설치되지 않았다. 생산조합운동을 추진한 사람들의 구상과 의도에 따라 조합을 계획·운영하지 못했다. 그들은 명확한 운동의 목표와 아울러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도를 설정·수립하지 못했다. 또한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444) 김경일, 위의 책, 417∼426쪽.

 그러면 이러한 노동자들의 생산조합운동의 의의는 무엇일까. 하나는 노동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체로서 생산조합은 노동력의 구입, 생산의 감독과 지휘, 노동 생산물의 소유 등 모든 측면에서 자본가의 개입을 배제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생산활동에서 자본가는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체로서의 생산조합이 지속적으로 작동하려면 자본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변혁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반적 사회조건의 변혁은 국가권력을 자본가들과 지주들로부터 생산자들 자신, 즉 노동자들에게 옮겨오지 않고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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