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6) 노동조합의 문화활동
  • (1) 노동자 교육활동

(1) 노동자 교육활동

 1920년대 노동조합의 노동자 교육활동으로 노동야학과 강연·강좌·토론회 등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교육활동의 목적은 계몽과 지식전파를 통하여 노동자들의 교양과 민족의식·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교육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당시에는 아직 낯설었던 노동문제에 대한 지식에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는 당면의 실제 목표로서 노조를 널리 선전하는 한편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445) 김경일, 위의 책, 432쪽.

 한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그것의 운영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노동자들 스스로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조선노동공제회 기관지≪공제≫7호에 있는<노동조합의 교육적 의의>에서는 “노동조합은 노동자에게 절호의 교육기관이올시다. 조합을 조직하는 것이 벌써 無上의 교육이니 각 지방에 백인이나 천인의 조합을 조성하고 이 조합을 적당하게 운영함에는 상당한 훈련을 요합니다”라고446)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36쪽. 했다.

 노동야학은 1907년 마산에서 처음 설립된 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 전국 각지에서 출현했다. 가령 1920∼1925년에 설립된 주요 노동야학 113개교 중 적어도 15개교 이상은 각지의 노동조합이 직접 발기하고 경영했다.447) 강동진,<일제지배하의 노동야학>(≪역사학보≫46, 1970), 16쪽. 예컨대 조선노동공제회는 1920년 9월 20일 서울에 서울노동공제회 야학을, 조선노농총동맹은 1924년 4월 19일 서울 종로3가에 서울노동학원을 설립했다. 이밖에 노동공제회·조선노동대회·조선노동연맹회·조선노농총동맹회 등의 산하 지방노동조합에서도 노동야학을 설립했다. 이러한 노동야학의 학생은 노동자들 자신과 그들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남존여비사상이 노동자들 사이에도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노동야학에 별로 가지 않았다.448) 강동진, 위의 글, 23쪽.

 당시 노동야학에서 가르치던 학과목은 조선어·일어·算術·한문 등 기초과목이었다. 1920년대 일제의 제도교육은 조선인의 민족의식·계급의식을 말살하기 위하여 이른바 황민화교육·동화교육을 실시하여 모든 학과목을 모두 일어로 가르치고 우리말을 조선어라 하고 일어를 ‘국어’라고 부르면서 ‘보통학교’에서의 조선어 시간은 주당 20시간, 일어를 64시간으로 배정하고 있었다.449) 김진균·정근식·강이수,<보통학교체제와 학교규율>(김진균·정근식 편저,≪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학과학사, 1997), 83쪽. 그러나 당시 노동야학에서는 조선어를 첫째가는 중요과목으로 삼고 있었다.

 노동야학의 교사들은 노동자 자신 이외에도 노동운동 등에 관심이 많은 정의감에 투철한 진보적인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예컨대 1921년 9월 부산부두노동자 5,000여 명의 총파업에서<선언문>·<요구조건>등의 문서를 작성해 주며 전략전술을 짜는 일에 참여하다가 일제에게 체포·구금되어 형까지 받은 조동혁·최태열·손명표·김경직 등은 바로 부산 영주동의 노동야학 교사였다.450) 강동진, 앞의 글, 25쪽.

 조선노농총동맹이 1924년 4월 19일 설립한 서울 종로3가 소재의 서울노동학원의 교사들은 노동자 교육 전문연구단체인 ‘조선노동교육회’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지방의 노동야학 교사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노동단체의 간부를 초빙하여 노동강연회를 열었다. 나아가 노동야학 학생들을 인솔하여 지방순회 노동강연회를 열어 노동자들의 민족적·계급적 각성을 촉진시키는 데 기여했다.451) 강동진, 위의 글, 26쪽.

 강연회는 조합의 창립일, 5·1절 파업투쟁 때, 사회 또는 시사문제에 대한 비판연설을 하는 등으로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강연회의 내용은 1920년대 전반기에는 노동의 의의와 근검절약·일반교양 등 계몽적이었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사회의식의 각성과 단결의 고취, 자본주의사회의 이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노동문제 인식 등의 강조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그리고 조합원 자체의 의식과 교양을 위한 토론회나 강습회를 열었다. 원산노동연합회가 1927년 7월 하순에서 10월 초까지 3개월에 걸쳐 진행한 강습회에는 60∼7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452) 김경일, 앞의 책, 462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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