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6) 노동조합의 문화활동
  • (3) 연예·체육 활동

(3) 연예·체육 활동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연극·음악·춤·운동회 등 연예·체육 활동은 흔히 노동조합의 정기대회나 창립기념식, 5·1절 위안회 때 이루어졌다. 1922년 9월 평양 노동동맹회 창립총회에서 남산현악대의 주악과 아울러 독창 등이, 1926년 11월 진주노동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는 악대의 가곡연주와 가야금 병창·가곡 독창과 아울러 희극 단막의 연극공연이 있었으며 식이 끝난 이후의 노동청년들의 제등행렬은 연희와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했다.457) 김경일, 위의 책, 444쪽.

 그러나 1920년대 중반 무렵까지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연예·체육 활동이 단순히 노동자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여흥 자체에만 그치는 경향이 강했고, 그것을 통한 노동자들의 단결과 계급의식을 한층 고양시키기에는 미흡했다. 그리하여 1928년 6월 최초의 산별노조라고 볼 수 있는 출판노조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계급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은 노동자들의 생활정서에 더욱 접근하면서 노동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었을 때 가능하다고 보아, 노동자위안회와 이를 통한 연예·체육 행사를 각 인쇄공장의 노동자들이 주관하고 노조가 이를 후원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예로 1930년 5월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출판노동자의 춘기위안회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인쇄노동자들이 주관했는데 900여 명의 조합원 및 가족들이 참석하여 2개조의<기본강령>과 12개조의<행동강령>및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하라”는 등의 3개조 표어를 채택했다. 여흥에서는 素樂과 춤·坐唱·바이올린과 만돌린 및 가야금 연주·촌극·가극·희극·雜歌寸談·철봉 등의 다채로운 연예·체육 행사를 거행했다.458) 김경일, 위의 책, 444∼445쪽.

 素人劇(전문연극인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연극) 등의 연극은 위안회나 정기대회 이후의 여흥으로 공연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노동자들의 교양과 계몽, 조합의 기금 마련 등을 위해 행해졌다. 1923년 4월 마산노농동우회의 취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연예회를 개최했는데, 동서양의 음악과 함께 ‘世의 俗情’이라는 사회인 연극을 공연했고, 1924년 5월에는 인천노동총동맹회에서 회관건축 기금마련을 위한 노동연극대회를 열었고, 담양군 내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의 공동숙박소를 마련하기 위해 1925년 8월 말과 9월 초에 걸쳐 노동청년회 주최와≪동아일보≫지국 후원으로 신파연극을 순회공연 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연극활동은 일반대중들로부터도 많은 성원을 받았다.

 1923년 조선노동연맹회는 5·1절 기념행사의 하나로 서울의 장충단에서 노동자들의 육상경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계획했다. 그리하여 인쇄직공·고무직공·이발직공 등 각 조합과 조선노동대회 및 지방의 정읍·진주·영주·청주 등지의 각 지부에 주최단체로 가입할 것을 촉구하는 권유장을 보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5·1절 기념 육상경기대회 행사 금지로 성사되지 못했다.459) 김경일, 위의 책,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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