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7) 노동조합의 국내적·국제적 연대
  • (1) 국내에서의 민족·민중 연대

(1) 국내에서의 민족·민중 연대

 먼저 국내의 노동조합들과 다른 민중조직들, 즉 농민단체·사상단체·청년단체·여성단체 등과의 상호 연대관계를 보자. 노조의 창립대회나 정기대회 등에서 서로 다른 지역이나 직종의 노동운동가들, 그리고 사상운동가들이나 민중운동가들이 자리를 함께 하여 축사를 하거나 축문을 보내 공동의 연대와 우의를 표시했다.461) 김경일, 위의 책, 441∼443쪽. 1920년대 전반기를 보면, 예컨대 1924년 7월 서울의 철공조합 창립총회에는 평양노동연합에서 축전을 보내왔고, 1923년 4월 평양에서 노동동맹회 제1회 정기총회에 축하의 뜻으로 서울에서 신생활사·무산자동맹회·무산청년회·노동연맹회·노동대회 및 풍기소작조합 등의 각 사상·노동·농민단체 등에서 축전을 보내왔다. 대구에서도 1925년 7월 노동친목회 창립대회 겸 발회식에는 철성단·용진단·혁조단 등 각 사상단체들과 대구청년회 등의 청년단체와 아울러 부산의 노우회 대표가 참석하여 축사를 했고, 목포에서도 1926년 10월 13일 300여 명이 참석한 노동총동맹 창립 1주년 기념식에 각 사회단체에서 다수의 축전과 축문을 보내왔으며, 서울의 전진회와 전남해방운동자동맹·목포청년회·일지청년회에서는 대표를 파견해 축사를 계획했다.

 1920년대 후반기를 보면, 1929년 5월 서울의 염색노조 제2회 정기대회에서는 출판노조·양복기공조합·중앙청년동맹 등을 대표하는 자들이 축사를 했고·경룡합동노조 제2회 정기대회가 공장주들의 방해로 유회되어 간담회로 대치되자 돈화청년회를 대표하는 자들의 감상담이 경찰의 금지 속에 계속되었고, 6월에 열린 정기대회에는 평양의 대동문노조를 비롯해 함흥노동연맹·함흥청년동맹 등 전국 각지의 우의단체들에서 보낸 축전·축문이 쇄도했고, 9월의 양복기공조합 창립 4주년 기념위안회에서는 출판노조·경성노동조합 등 각 우의단체를 대표한 자들의 축사가 있었다.

 노동조합의 활동 가운데는 간담회나 간친회를 조직·개최하는 것이 있었다.462) 김경일, 위의 책, 451∼455쪽. 이는 지역 내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농민이나 청년·여성·형평 등의 다른 사회운동 부문까지 망라해 민중운동자모임·해방운동자모임·사회운동자모임 등의 명칭으로 개최되었다. 예컨대 1925년 7월 인쇄직공조합 주최로 재경노동단체연합간친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철공·양말·급수부·양화 등의 각 노동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여 경성노동연맹회를 조직했다. 평양에서는 1925년 음력 정월 1일에 노농연합회가 노동운동자간친회를 주관했다. 그 취지는 “같은 계급에서 같은 경우에 처하여 있는 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나간 해에 괴로웠던 일들을 서로 말하고 아울러 새해부터는 일층 단결을 굳게 하여 새로운 앞길을 힘있게 개척하여 나아갈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으로 평양은 물론 관서 각 지방의 노동청년단체들까지 초청되었다. 경남지방에서도 부산의 노동동맹회와 진주의 노동공제회, 마산의 노농동우회의 세 단체 주최로 1924년 1월 경남노농운동자신년연합간친회가 열려 서울·광주 등 전국 각지의 사회운동가들이 참석하여 노동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 대구에서는 1926년 4월 노동공제회를 비롯해 청년동맹과 철성단 등의 각 노동·청년·사상단체 대표들이 합동간친회를 열어 지역 운동단체의 합동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인천에서도 1925년 인천노농총동맹이 제2회 간친회를 열었는데 서울에서 노총과 신흥청년동맹·화요회·여성동우회·해방운동사 등의 대표가, 광주와 예천 등지에서도 대표들이 파견되었다. 경북에서는 1925년 2월 안동청년회관에서 경북노농운동자간친회가 개최되어 각지의 운동가들은 운동선상에서 체험한 경험담에서 무산계급의 비참한 생활상태에 대해 담화하다가 당시 노총 집행위원이었던 권오설의 제안으로 노농운동에 관한 당면 문제들을 결의했다. 전북 이리에서도 1927년 3월에 사회운동자대회의 형태로 간담회가 개최되어 각 지방 운동상황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아울러 금후의 운동방침 수립을 비롯한 당면문제가 토의되었다. 이와 같은 간담회나 간친회를 통해 운동가들은 각 지역사정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운동방침을 수립하거나 자파의 결속과 연대를 추구했다.

 노동조합의 신간회와의 민족적 연대도 주목된다. 1927년 12월 18일 신간회 동경지회 제2회 대회에서 신간회의 기본정책으로 제안한 20여 개 조항 가운데는 “⑦ 단결권·파업권·단체계약권의 확립, ⑫ 소년 및 부인의 야업노동·갱내노동 및 위험작업의 금지, ⑬ 8시간 노동제의 실시, ⑭ 최저임금·최저봉급제의 실시, ⑮ 공장법·광업법·해원법의 제정” 등의 노동자들을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신간회에 많은 노동운동지도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463) 김윤환, 앞의 책, 196쪽. 그리고 1931년 5월 신간회 회원의 ‘직업별 구성비’를 보면, 농민 53.9%, 그 다음으로 노동자들이 22.1%였다. 이것은 당시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노동자 구성비가 약 9%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극히 높은 것이었다.464) 水野直樹,<신간회운동에 관한 약간의 문제>(스칼로피노·이정식 외 6인,≪신간회연구≫, 동녘, 1983), 86∼87쪽. 1929년 5월 서울의 경룡합동노조 제2회 정기대회를 대신한 간담회에는 신간회 경서지회에서 사람을 보내왔고, 9월의 양복기공조합 창립 4주년 기념위안회에는 신간회 경성지회를 대표한 사람의 축사가 있었다.465) 김경일, 앞의 책, 443쪽. 1928년 2월 대구에서는 노동공제회와 청년동맹·신간회지회 등의 주최로 열린 민중운동자신년간담회에서는 신간회 지지와 아울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획득에 관한 건 등이 논의되었다.466) 김경일, 위의 책, 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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