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7) 노동조합의 국내적·국제적 연대
  • (2) 세계 노동자계급과의 동지적 연대

(2) 세계 노동자계급과의 동지적 연대

 1920년대 조선의 노동조합의 세계 노동자계급과의 동지적 연대 관계는 노조의 5·1절 기념대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메이데이는 “전세계 노동자가 파업과 집회·시위를 통해 국제적 단결과 혁명적 역량을 과시하는 노동자 투쟁의 날이며 축제의 날이다. 이 날은 세계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노동자의 공동 적에 대해 함께 싸우는 노동자 국제 연대의 날”이다.467) 구로역사연구소,≪우리나라 메이데이의 역사≫(거름, 1990), 34쪽.

 조선에서의 최초의 5·1절 행사는 서울의 조선노동연맹회의 주관에 의하여 1923년에 이루어졌다. 노동연맹회에서는 5월 1일 서울지역 노동자들 전부가 휴업을 단행하고 장충단에서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고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계획했다. 당시 일본 북풍회에서는 노동연맹회와 연락하여 5월 1일을 기하여 시위운동을 결행하기로 선전문 등을 인쇄해 서울로 우송했으나 경찰이 압수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5월 1일 양화직공과 양복직공·인쇄직공·고무직공 등이 파업을 했고, 당일 밤에는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제 기념에 대하여’라는 강연회가 열렸다. 마산에서는 노농동우회가 중심이 되어 시위를 전개했다. 노동자들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들은 ‘8시간 노동제 쟁취’와 노동자 단결을 외쳤다.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민족개량주의자들을 폭로하는 계기로도 활용했다. 이러한 대중적인 5·1절 기념투쟁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을 크게 제고하고 단결을 강화했다. 이는 또한 조선의 노동자계급이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공동투쟁에 합류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924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이 5월 1일 오후 1시에 서울의 시천교당에서 열려던 메이데이 기념강연회는 일제의 금지조치로 무산되었으나, 신생활사의 인쇄직공, 서울시내 9개 양말공장 직공들은 1일 동맹파업을 전개해 이 날을 기념했다. 지방의 마산·함흥 등지에서도 기념강연회로써 행사를 대신해야 했다. 1925년 메이데이에는 조선노농총동맹에서 “① 8시간 노동과 최저 임금의 확정, ② 4할 소작료와 지세의 지주 부담, ③ 일제의 식민지 착취기관인 동척에 의한 일본 농민의 조선 이민 반대, ④ 언론·집회의 자유 개방, ⑤ 노농 민중의 문맹 퇴치” 등의 투쟁슬로건을 내걸고 노동자와 농민의 기념투쟁을 지원했다. 인천·대구·강경·홍원·진주·광주·군산·나주·진영·함흥 등지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인천노동총동맹이 개최한 강연회의 주제는 “① 노동자와 노동절, ② 메이데이의 역사, ③ 메이데이의 역사적 사명, ④ 무산계급 해방과 메이데이”468) 구로역사연구소, 위의 책, 55∼58쪽. 등이었다. 평양에서는 1924년 5·1절에 평양노동연맹회의 회원들이 자동차 2대에 나누어 타고 “만국 노동자동맹 만만세”라는 기념노래를 인쇄한 선전 삐라 5,000장을 시내에 뿌릴 계획을 세웠다.

 메이데이는 이제 조선의 노동자는 물론이고 조선 민중의 가슴에 빼앗길 수 없는 날로 자리잡아 갔다. 당시≪조선일보≫사설에서는 “메이데이, 온세계 노동계급과 동일한 의식을 가지고 압박으로부터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는 날”이라고 규정했다. 1926년 4월 22일 조선노농총동맹은 상무위원회를 열고 메이데이 기념행사 준비를 진행했다. 노농총동맹 주관 아래 각 단체연합으로 거행하기로 했다. 당일 행사로는 기념강연회·표어 발표회·메이데이 노래·선전지 발표 등을 하기로 계획했다.

 1927년 메이데이 때는 조선노동총동맹의 준비 모임마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각 단체별로 준비했다. 대동강선운노조에서는 오전 11시에 조합원 전부가 모여 10여 척의 선박에 분승하여 “메이데이 만세 5월 1일은 우리들 동지의 단결의 힘을 보이는 날이다. 우리는 이날을 뜻있게 기념하자. 만국 무산대중아, 단결하자”는 문구를 적흑색으로 대서특필하여 대동강 위에서 시위행렬을 한 후 모란대에 올라 기념촬영을 했다. 공주와 보성에서는<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주적인 일제를 몰아내자>는 격문이 뿌려졌다. 1928년 원산노련 산하 42개 가맹단체의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1일 총파업을 단행하고 투쟁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 쟁취”,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진남포에서는 1928년 5·1절을 앞두고 점원상조회·정미노동조합을 비롯한 일반노동자들이 전시가지에 삐라를 살포한 후 낮에는 수천 명의 기념시위 행렬을 계획하고 밤에는 연합기념 대강연회를 개최하고자 했다.469) 구로역사연구소, 위의 책, 60∼64쪽. 부산에서는 1929년의 5·1절에 노우회와 부산청맹·경남도청년연맹 세 단체가 연합하여 행사를 추진, 부산역전에 집합하여 시가행렬을 하고 야간에는 기념대강연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준비위원 5인을 선출했다. 1929년 메이데이에는 마산노련 주관으로 추산공원에서 노동자들 6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산놀이회를 개최해 이날을 기념했다.470) 김경일, 앞의 책, 450∼460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