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8)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 (1) 1920년대 전반기 파업투쟁

(1) 1920년대 전반기 파업투쟁

 파업투쟁의 대부분이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끝날지라도 그들이 파업투쟁을 감행하는 이유에 대하여 엥겔스(Friedrich Engels)는≪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임금삭감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러한 삭감의 필연성에 대해서까지도 저항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은 인간으로서 그들 자신이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황이 그들에게, 즉 인간에 맞게 조정되어야 한다고 선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는 침묵은, 부르주아지가 노동력 수급사정이 좋은 시기(호황기)에는 노동자들을 수탈하고 나쁜 시기(불황기)에는 그들을 굶어 죽도록 내버려둘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모든 인간적 감정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아닌 한, 이러한 사태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가 아니라 파업으로 저항하는 까닭은 그들이 … 즉 실천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F·엥겔스 지음, 박준식·전병유·조효래 옮김,≪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두리, 1988, 261∼262쪽).

 일제의 관청 통계에 의하더라도 1920∼1925년 간에 발생한 파업 건수는 335건, 파업참가자 수는 28,293명이었다. 파업투쟁에 참가한 노동자의 수와 당시 전체 노동자수를 교차시켜 보면 노동자계급의 力動性이 상당했다.471) 윤여덕, 앞의 책, 83쪽. 이에는 사상단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급과, 본격적인 노동조합 조직운동의 전개가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 전반기의 파업 발생 원인을 보면, 파업참가자 총수의 52.1%가 노동조건의 개선, 즉 임금의 증액과 대우개선을 요구하여 파업을 일으켰다. 파업참가자 총수의 13%만이 노동조건의 악화, 즉 임금인하를 반대하여 나섰다. 이것은 이 시기 파업투쟁이 주로 공격적인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공격적인 파업일수록 성공률은 더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적인 파업이 완강성을 띠지는 않았다. 파업투쟁의 완강성이 파업의 평균 지속기간에 의해 측정될 경우 평양·서울·부산 등지에서 전개된 몇 개의 노동자 파업 이외에는 대체로 단기간 파업들이었다.

 파업 참가자들의 지역별 분포 상태를 보면, 파업 참가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큰 항구들과 산업이 비교적 발전된 경기도·경상남도·전라북도·평안남도·함경남도·경상북도·전라남도 등에 집중되었다. 파업 참가자들의 산업 부문별 분포 상태를 보면 방직제사노동자·정미제분노동자·각종 소규모 공장노동자·광산노동자·운수 및 부두노동자·토목건축노동자 등으로 나누어 볼 때, 1920년대 이전 시기부터 일정하게 훈련되어온 운수 및 부두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의 선두를 이루었다. 파업의 규모를 보면, 당시 노동자 50명 미만을 사용하는 공장·기업소는 전체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파업 총건수의 52.3%는 노동자 50∼1,000명이 참가한 비교적 큰 파업들이었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자 파업은 일반적으로 자발적인 투쟁으로 주로 임금인상의 요구, 임금인하 반대 등을 요구한 경제적 투쟁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파업은 대부분 일본인 자본가들을 반대하는 투쟁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제경찰의 탄압을 받았고 따라서 파업투쟁은 일제경찰의 폭압을 반대하는 투쟁과 결부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노동자계급의 반일의식도 빠르게 고양되어 갔고,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에게는 정치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472) 윤여덕, 위의 책, 93쪽.

 1920년대 전반기 파업투쟁에서의 노동단체들의 역할을 보면, 계몽적인 성격이 강한 조선노동공제회·조선노동대회, 그리고 이들 산하단체들이 활동하던 1920∼1922년 간에는 그들의 활동이 미약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을 직접 조직하거나 지도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보다 계급의식적인 성격이 강한 조선노동연맹회·조선노농총동맹·조선공산당, 그리고 이들 산하단체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1923∼1925년 간에 와서 파업투쟁에서 노동단체들의 역할이 강화되어 갔다.473) 1920년대의 각 지역 파업건수에 대한 노동조합의 건수는 지역에 따라 대략 10∼40% 정도에 걸쳐 평균적으로 20%를 상회하는 비교적 높은 비율을 보였다(김경일, 앞의 책, 360쪽).

 노동조합들은 노동자 대중 속에 침투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자들의 생활과 노동조건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자본가들에 대한 그들의 불만·불평을 조직적 투쟁으로 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각지 노동단체들은 동일지역뿐만 아니라 타지방의 노동자 파업까지도 성원하기 위하여 ‘쟁의응원’의 구호하에 파업기금의 모집, 격문·격전의 발송, 동정연설회 등을 조직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연대성은 강화되어 갔다.474)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55∼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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