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8)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 (2) 1920년대 후반기 파업투쟁

(2) 1920년대 후반기 파업투쟁

 1926∼1928년에는 조선공산당이 창건된 이후, 6·10만세운동이 발생하고 신간회가 창립되어 활동하고, 조선노농총동맹으로부터 조선노동총동맹이 조직적으로 분리·개편되고, 직업별 노동조합의 지역별 노동연맹체와 전국적 노동연맹체 조직운동이 벌어지고 나아가서는 산업별 노동조합 건설운동이 시작되고, 조선공산당이 해체되는 사건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1926∼1928년의 3년간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건수는 291건, 파업참가자 수는 2만 4,266명이었다. 이것은 1920년대 전반기 6년 동안에 일어난 파업과 비교해 볼 때 파업투쟁의 커다란 성장이었다. 즉 전반기 6년 동안의 파업건수 335건에 비하여 후반기 3년의 파업 건수가 약 87%를 차지했고, 전반기 6년 동안의 파업참가자 수 2만 8,293명의 약 86%를 차지했다.

 파업 참가자들의 지역적 분포상태를 보면, 노동자 파업투쟁의 지역적 범위가 1920년대 전반기에 비하면 현저하게 확대되었다. 전반기에는 파업투쟁이 주로 남부 지역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비하여, 후반기에는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특히 북부 지역 일대에 새로운 공업중심지가 조성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파업투쟁의 중심지가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파업참가 수의 거의 40%가 함경남북도·평안남도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파업 참가자들의 직업별 분포상태를 보면, 전반기에는 부진했던 광산노동자들과 토목건축노동자들의 진출이 후반기에 와서 활발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파업참가자 수의 40%를 부두 및 운수 노동자들이 차지하여 파업투쟁의 선두에 섰고, 각종 공장노동자들이 25%, 토목건축노동자들이 13%, 광산노동자들이 7% 등을 차지했다.

 1926∼1928년의 파업투쟁의 완강성을 말해주는 지구적 성격도 강화되었다. 목포제유공파업·영흥흑연 광부파업 등은 50∼70일 간에 걸쳐 치열하게 투쟁했다. 파업의 전술적 측면에서도 앞 시기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자위적 조직인 ‘규찰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규찰대는 1927년 무렵부터 함남지방에서 나타나 점차 각지로 확대되었다. 규찰대는 일제 경찰의 탄압과 반동적인 폭력단·파업깨기꾼들에 대항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전투부대였다. 또한 규찰대는 파업단의 질서와 규율을 유지하며 파업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목적도 있었다.

 1926∼1928년의 파업투쟁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성도 강화되었다. 어느 사업장에 파업투쟁이 발생하면 동일부문·동일지역 노동자들의 동정파업이 빈번히 전개되었고, 실업 노동자들도 자본가들의 파업파괴를 위한 새 노동자 모집음모를 단연 배격하고 파업투쟁을 지지했다.

 이 시기 파업투쟁은 경제적 투쟁의 성격뿐만 아니라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는 5·1절 기념시위와 파업, 이를 탄압하려는 일제 경찰들과의 유혈적 충돌, 규찰대의 조직, 일제 경찰의 횡포를 반대하는 공격적 시위 등에서 볼 수 있었다.475) 김인걸·강현욱, 위의 책, 8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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