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1) 국내외 항일여성운동
  • (2) 해외 항일여성운동

(2) 해외 항일여성운동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만주를 비롯한 중국·일본·연해주 및 미주에서는 3·1운동 이전부터 조국광복을 위한 여성들의 민족독립운동이 추진되고 있었으며, 3·1운동 이후 보다 적극적이고도 조직화된 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중심지인 만주를 비롯한 상해·천진 등지의 한인 부인사회에서는 3·1운동 이후 여권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독립의식을 함양시키는 여자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장차 수행될 독립전쟁에는 여성들도 남자와 동등한 국민 자격으로 참여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애국부인회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상해애국부인회·혼춘애국부인회494) 1919년 9월 25일 조직되었는데, 그 목적은 평시에는 여자교육과 여권확장운동을 하고 전시에는 부상병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은 독립의연금을 모집하는 활동도 하였다(≪독립신문≫, 1919년 10월 16일,<琿春大韓愛國婦人會>).·천진애국부인회495)≪독립신문≫, 1921년 11월 11일,<外交後援에 대한 婦人界의 義捐募集>.·간도부인애국회496)≪독립신문≫, 1923년 11월 30일,<墾島婦人愛國會>.·안주독립부인단497)≪독립신문≫, 1921년 8월 15일,<安州婦人獨立團>. 등이 그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해에는 국내외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에는 1920년 2월 현재 30여 명의 지도급 부녀들이 있었다. 이들은 거의 모두 근대교육을 받은 여학교 출신들로서, 3·1운동 이래 국내에서 광복운동을 하다가 수개월의 옥고를 치른 이를 비롯한 민족독립운동계의 대표들이었다.498)≪독립신문≫, 1920년 2월 17일,<婦人과 獨立運動>. 이들은 1919년 10월 13일 애국부인회를 조직,499) 임원은 회장 李華淑, 부회장 金元慶, 총무 李善實, 서기 李奉順·姜錫賢, 회계 李메리·李敎信, 출판부 趙淑卿, 교제 姜千福·朴仁善·李메리, 사찰 尹淑卿·洪光善 등임. 국내외 애국부인회의 총본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임정의 요원으로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활동을 비밀리에 행하고, 상해에서는 부녀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업들을 추진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기여하였다. 그들은 독립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자 민족독립정신을 진작시키는 연극회·연예회 등을 개최하였다.500)≪독립신문≫, 1922년 3월 1일,<我愛國婦人會의 歌舞劇大演奏會>. 이들은 독립운동에 관한 수천 부의 사진첩을 만들어 서양인들과 漢人들에게 배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운동을 연상하는 기념품을 만들어 우리의 독립을 지원하는 세계 인사들에게 보내는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사료와 선전재료를 수집하는 데 종사하고 재무부의 收稅員·군무부의 의용병 권유원의 역할을 하였고, 학교 교사와 적십자회 간호부로서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등 그들의 사업은 자못 다양하였다. 이러한 애국부인회의 활동에 대하여 당시≪독립신문≫(1920년 2월 17일)에서는 “상해 남자는 아무 사무 없이 優遊하는 자가 있으나 여자는 1인도 그러한 자가 없다”고 높이 평하였다. 그러나 여자들의 이러한 활동은 남자들이 행하는 독립운동의 보조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애국부인회 창립 당시 安昌浩는 부인회 사업 12개조를 제시하였는데501) 安昌浩,≪일기≫, 1920년 2월 5·6·16일. 애국부인회운동의 활동 내용이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김연실·李奉順 등은 독립전쟁 최전선에서 남자들과 동등하게 활약하고자 하는 포부를 안고 안창호에게 육군사관학교 입학의 뜻을 밝히자 남자와 동학할 수 없는 형편이니 홍십자병원에 들어가 간호원 수업을 받으라고 권하였다.502) 安昌浩,≪일기≫, 1920년 1월 19일.
―――,≪安島山全書≫(三中堂, 1971), 628쪽.

 1923년 국민대표대회 이후 임시정부의 위상이 약해지면서 애국부인회의 활동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 12월에 조직된 上海韓國女子俱樂部503)≪朝鮮民族運動年鑑≫, 1925년 12월 10일·1928년 7월 20일.는 정치·경제에서의 남녀평등 실현과 신생활을 개척할 실천적 학술연구와 정신적 수양 및 신체적 단련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이후 대표적 민족운동계 부녀단체로 활동하였다.

 우리의 독립운동계는 그 운동의 활성화로서 1920년대 초에 사회주의사상을 일부에서 수용하였다. 여성계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22년 모스크바(Moscow)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여성계 대표로서 金元慶과 권애라가 참여하였다. 사회주의계의 부녀운동론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반에 걸쳐 보다 철저하게 성평등을 제시하였다.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는<국제부인데이를 맞이하여>라는 제목의 격문에서 “전민족적 총역량을 집중하여 전세계 여성해방을 위해 투쟁하자”504)≪朝鮮民族運動年鑑≫, 1929년 3월 8일.고 주장하였다.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1930년대에 들어가면 보다 활발해진다.

 중요한 항일운동의 기지인 북간도의 汪淸縣 白草溝의 1921년 3·1독립선언 축하식장에서 강개한 연설로 수만 군중을 감읍시킨 18세의 여인 李涵이 같은 해 4월에 간도부인애국회를 발기하였는데, 1923년 11월 현재 3,0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대규모의 애국부인 단체가 되었다. 3,000여 회원이라면 백초구 부인들만이 아닌 북간도 여러 지역의 부인들을 지역별 지회로 조직, 활동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간도부인애국회의 설립취지는 2,000만 민족의 절반이 되는 우리 여자들도 독립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있으므로 독립사업을 남자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여자들도 한번 결심하여 독립후원에 힘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령으로 ① 인도와 정의를 부식할 것, ② 여자계의 사상을 振起할 것, ③ 독립군 후원에 종사할 것 등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바, 1923년 1월 1일자≪독립신문≫의<恭賀新年>광고에 간도 지방의 10개 단체 중의 한 단체로 참여하였다.505)≪독립신문≫, 1923년 1월 1일,<恭賀新年>광고.

 1924년 4월 중순 서간도 興京에서 河貞淑·韓承恩·劉得信·崔京善 등 28명의 발기로 여자교육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취지는 만주에 여자교육을 보급시킴으로써 대한여자의 본능을 발휘하고 나아가 세계적 여자가 되는 데 손색이 없도록 노력하자는 것이었다.506)≪독립신문≫, 1924년 5월 31일,<西間島 女子敎育會>. 즉 대한의 여성 능력을 세계로 뻗어 나가겠다는 큰 포부를 나타내었다.

 러시아 해삼위에는 일찍이 이주 한인들로 한인촌들이 형성되어 있어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이 활발하였다. 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남자들과 같이 활동하는 부녀들도 많았다. 부녀들의 의지로 활동하고자 조직된 단체로는 소녀애국단·노부인회 등507)≪독립신문≫, 1919년 10월 25일,<海蔘威 通信>·1921년 3월 30일, 뒤바보,<아령실기>(9).이 있으며, 1923년 국민대표대회시에도 해삼위 부녀계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민족독립의식을 일깨우는 각가지 사업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에 동경유학생들이 동경 히비야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 구금되었는데 黃信德을 비롯한 여학생들도 참여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여성운동이 강세를 띠어 丁七星 등 유학생들이 三月會를 조직하여 국내여성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국외 여성항일운동에서 괄목할 만한 것은 하와이의 부인구제회와 미주 서부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대한여자애국단이다. 1919년 3월 15일 하와이 각지방 부녀대표 41명이 호놀룰루(Honolulu)에서 조국독립운동 후원을 결의하고, 29일 2차대회에서 대한부인구제회508) 김원용,≪재미한인오십년사≫(1959), 232∼237쪽.를 결성, 회장으로 황마리아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외교선전사업에 동참하여 조국의 독립을 국외에 선전하고, 3·1운동 死傷志士와 그 가족에 대한 구제사업을 행하고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정에 송부하는 등의 광복운동 후원사업을 꾸준히 행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509) 朴容玉,<美洲韓人女性團體의 光復運動支援硏究:大韓女子愛國團을 중심으로>(≪震檀學報≫78, 1994) 참조.은 3·1독립선언의 소식을 접한 후 캘리포니아 각지에 기왕에 조직, 활동하던 부인회들이 1919년 8월 2일 다뉴바에 모여 합동 발기대회를 개최하고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로부터 5일에 인준을 받아 정식 발족을 하여 활동을 하였다. 이 단체는 본부를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 나중에는 로스앤젤레스에 두고 다뉴바·사크라멘토·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윌로우스·오클랜드를 비롯하여 멕시코의 메리다와 쿠바의 마탄자스·하바나·갈데나스 등지에까지 지회를 둔 대규모의 조국광복 후원단체였다. 이들은 군자금을 정기적을 모집하여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단체에 보냈으며, 항일중국군과 광복군 창설시에도 지원금을 보냈다. 또한 태평양전쟁시에는 미국 적십자사업을 도왔고 미국정부 발행의 전시공채의 매입·발매사업 등의 눈부신 후방공작사업을 하였다. 한편 교포사회의 질적 향상을 위한 사업들도 꾸준하게 행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의 활동은 평등적이고 민주적인 정신을 기조로 하였고, 그들의 활동이 중국·미국 등의 우방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인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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