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2) 한국여성운동의 확대와 발전
  • (1) 서울의 여성계몽교육운동

(1) 서울의 여성계몽교육운동

 3·1운동 이후 여성계몽교육운동론이 사회적 과제로 다시 대두되었다. 이 운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먼저 일어났고 곧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여성계몽교육운동을 선도한 서울의 대표적 여성단체로는 朝鮮女子敎育協會·조선여자청년회·반도여자청년회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여자교육협회는 車美理士가 1920년 4월 상순에 서울 종교예배당에 부녀자야학회를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다.511)≪東亞日報≫, 1920년 4월 23일,<여자교육회>. 학생은 18명으로 이들을 두 반으로 나누어 매일 2시간씩 주 4일간 조선어·산술·글씨·도화를 현직 교사들의 봉사로 가르쳤다. 학생들은 주로 취학의 기회를 상실하여 정규학교 교육을 받기 어려운 가정부인들이었다. 개강 초에 18명이던 학생 수가 1주일 후에 약 50명으로 늘어났고, 한 학기가 끝난 다음의 새 학기 초에는 150∼160명으로 늘어났다.512)≪東亞日報≫, 1920년 9월 17일,<여자교육회 여자야학회>. 수강생들은 주로 조혼으로 신학문·신문화에 대한 배움이 없어 유학생 남편으로부터 소박받은 부인들이었다고 하였으니 이들의 배움은 곧 새 삶에 대한 강한 욕구였던 것이다.

 차미리사는 19세에 과부가 된 후 뜻을 세워 신교육을 받고자 중국 유학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513) 朴容玉,<車美理士의 美洲에서의 國權回復運動>(≪한국민족운동사연구≫25, 2000) 참조. 귀국한 후 배화여학교 사감으로 봉직하면서≪여자시론≫을 간행하여 부녀교육에 힘쓰던 중 제6호로 발매·반포 금지를 당하였다.514)≪別乾坤≫, 1930년 10月號에는 제4호로 정간되었다고 했으나,≪東亞日報≫, 1921년 4월 26일자에는 제6호가 발매·반포를 금지되었다고 하였다. 그녀는 부녀교육의 시급성을 절감하여 배화여학교를 사직하고 조선여자교육협회를 통한 여성교육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차미리사는 金善·李銀·白玉福·許貞子·金順福·金恩洙 등 청년여성들로 전국순회 하기강연단을 조직하여 1921년 7월 9일 서울역에서 경의선을 타고 북으로 출발하였다. 부인교육운동을 지방으로 확대시키기 위한 이 강연단은 9월 29일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84일간 전국의 지방 주요 도시 60여 처를 순회하며 강연·연극회 등을 하여 청중을 감동시켰다. 이들의 강연에 감동되어 여자 야학을 설립한 지방도 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부녀교육용 의연금이 답지하였다.515)≪東亞日報≫, 1921년 10월 4일,<女子敎育會報告講演會>. 안성여자교육회의 경우는 차미리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남녀 방청인이 무려 500∼600명516)≪東亞日報≫, 1921년 3월 14日.이나 모여드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동아일보≫의 사설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여자교육회의 활동을 통하여 당시 사회가 여자교육의 실현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지원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이번 순회강연회의 사업에 이르러서는 다만 감탄할 뿐이다. 84일의 장기간에 전선 극남·극북·극동·극서를 다니면서 60여 개소를 순회하였으며 그간 경비는 3,000여 원인데 지방 인사의 동정과 원조로 충당하고 또한 2,000여 원의 의연금이 남았다고 한다. 이 또한 반도사의 기록이다. 남자사회에도 일찍이 단체행동으로 80여 일, 60여 처를 순회 강연한 예가 없는데 바깥출입을 못한 여자사회랴. 과연 여자는 약한 자이며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로다. 약하지 아니하고 어리석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남자보다 강한 자도 있고 더 아는 자도 있도다. … 과거에 있어서는 여자가 교육을 받을 기회가 남자만 못하여 이로 인하여 능력상의 차가 변하여 정치상의 불평등을 이루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정치상의 불평등도 차차 변하였으며 교육상의 불평등이 대부분 제거되었으니 이것이 곧 장차 사회의 만민평등을 실현할 기초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조선여자의 운동이 교육회로 시작한 것은 참으로 그 건전한 발달이 있는 것을 믿고 축하해마지 않는다(≪동아일보≫, 1921년 10월 10일).

 조선여자교육회의 전국순회강연회는 그 규모가 크고 또 장기간에 걸쳐 행하여졌다는 데서 사회적 주목이 더욱 컸던 것이다. 당시 한국의 장래를 생각하는 배운 젊은이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인이 갖고 있는 낡은 시대의 생각과 생활관습을 변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외국 유학을 한 선각적 여성들은 전국순회강연대를 조직하여 계몽적인 교육활동을 하였다. 1920년 하기방학을 이용한 이화전도대517)≪朝鮮日報≫, 1920년 6월 24일,<꽃같은 處女의 梨花傳道隊>·28일,<女子傳道隊>.의 활동이 있었고, 1921년 하기방학에는 동경 여자유학생 劉英俊·朴順天·김선 등이 “남녀사회에 새 정신을 넣어주고자 전도를 편답”518)≪朝鮮日報≫, 1921년 9월 6일,<朝鮮女子巡廻講演團>.하는 여자순회강연단 활동이 있었다. 海西 각지를 순회한 황해도 장로교회 해서諸職會 학무부에서 행한 여자교육선전강연대519)≪朝鮮日報≫, 1923년 10월 9일,<女子敎育宣傳巡講>.도 이러한 활동에 속하는 것이었다.

 차미리사의 부단한 노력으로 조선여자교육회는 1921년 5월에 청진동에 회관을 가지게 되면서 성숙된 여성교육을 추진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부녀교육의 목표와 이념은 여성들의 자립생활 교육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1인 1기의 실용·실천교육에 힘썼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교육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여자교육협회 안에 양복과와 여자상업과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부녀교육 활동을 발전시켜 그녀는 오늘날 덕성학원의 전신인 근화여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조선여자청년회520) 조선여자청년회의 세세한 활동들은≪동아일보≫·≪조선일보≫등의 신문에 다수 게재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들의 활동을 총체적으로 설명한≪朝鮮日報≫, 1925년 12월 17일,<가정부인:경성에서 활동하는 여자단체>(1)에 의거하였다.는 1922년 4월 8일에 회장 신앨버트와 孫貞圭·成義敬·任永信·方茂吉 등이 “조선여자의 문화향상을 촉진하고 생활개선에 노력하자”는 목적으로 발기·설립하였다. 설립 초 5개월은 태화여자관 강당을 빌려 쓰다가 회원이 증가하자 방무길의 집(관수동) 사랑채를 빌려 부인강습회를 주야로 실시하였다. 회원은 1925년 말 당시 16∼40세의 80여 명으로, 그 중 25∼35세가 가장 많다고 했다. 회원의 직업은 학교 교원이 대다수이고 학생, 견직회사 부인 및 가정부인이었다. 경비는 회비와 사회 각계의 기부금에 의지하였다. 閔泳徽로부터 받은 500원의 기부금과 경성도서관장 李範昇으로부터 아동도서열람실과 사무실을 밤에만 쓸 수 있도록 빌리게 된 것은 조선여자청년회 사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23년 9월부터 회관을 이 곳으로 옮기고 부인강습소를 조선여자학원으로 고쳐 수준급의 여성교육을 시작하였다. 여성교육은 일반 학교 교과에 준하는 지식교육과 여성자활에 도움을 주는 기술교육을 행하였다. 부인강습회 개최시에 이미 재봉부를 두어 6개월 코스로 학생운동복·와이셔츠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매 토요일 저녁마다 각계 인사를 초빙하여 부인들의 상식을 넓혀주는 부인강좌를 실시하여 기계과학·보건위생·육아업 등 유익한 신지식을 교육, 보급하였다.521)≪別乾坤≫(新年號, 1927), 81쪽.

 이러한 활동은 가정에 묻혀 있는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줌으로써 각 가정을 개화시키고 나아가 아직도 뒤쳐진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동 청년회의 이러한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1924년 10월부터 해마다 봄·가을로 조선일보사와 협력, 부인견학단을 조직하여 우리 생활에 직접 관계되는 각 회사와 공장 등을 직접 보고 배우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운동은 가정에만 칩거하였던 부인들을 사회로 나오게 하여 새로운 문물을 보게 함으로써 부인들의 사회의식을 깨우치려는 것이었다. 신앨버트는 “배움에 목마른 우리 여자들이 날마다 문이 매이게 들어오지만 앉을 곳이 있어야 받아들이지요”라고 하면서 학원의 독자적인 회관을 짓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부인들이 배움에 대하여 얼마나 목말라 했는가를 알게 한다.

 반도여자청년회522)≪朝鮮日報≫, 1925년 12월 23일,<가정부인:경성에서 활동하는 여성단체>(6).는 1923년 9월 25일에 申淑瓊·李明順 외 6명의 발기로 廣進부인회를 발기, 조직하고 주된 사업으로 광진여자강습소를 개설하여 학령이 지난 가정부인들의 교육을 행하였다. 광진부인회 회원들은 30세 내외로부터 50세 이상의 노부인으로 구성되었다. 광진부인회는 1925년 1월에 회명을 반도여자청년회로 바꾸고 회원의 모집·관리를 할 사교부와 학원을 발전시킬 교육부를 두고 사업을 확대시켰다. 회원의 연령도 20세로부터 50세 이상 60세라도 청년의 마음을 가지고 일할 만한 부인은 누구라도 받아들였다. 그리고 광진여자강습소는 반도여자학원으로 바꾸어 고등과·보통과·영어반을 두고 야학으로 운영하였다. 1925년 여름 큰 홍수가 있어 수많은 수재민이 생겼다. 그때 반도여자청년회 회원 12명이 조선일보사 사원을 도와 뚝섬 피난민수용소에서 밥을 해 주는 사회사업도 행하였다. 회와 학원의 운영비는 회비와 각계의 동정금 등과 신숙경의 개인재산에 의거하였다. 자식 없이 과부가 된 신숙경은 뜻이 있어 자신의 재산을 바쳐 여자교육사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