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2) 한국여성운동의 확대와 발전
  • (3) 기독교 여성의 여성운동: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와 조선여자

(3) 기독교 여성의 여성운동: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와 조선여자

 기독교절제회

 1923년 8월 18일에 金活蘭·金弼禮·兪珏卿에 의하여 창립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는 3·1운동 이후의 기독교 여성세력의 증대라는 종교적 배경과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필연적으로 탄생케 된 것이다.

 YWCA 탄생의 시단은 1922년 6월 13일부터 12일간 개최된 제1회 女子夏令會이다. 이 하령회에는 전국의 공·사립 여학교 대표와 급속히 늘어난 각종 여성단체 대표 약 70명이 초청되었는데 이들 중 65명이 참여하였다.523) 대한YWCA연합회,≪한국 YWCA 반백년≫(1976). 이들은 “새로운 정신을 가지고 조선사회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여자들에게 일층 원기를 주고 자각을 주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마지막 이틀 동안에는 당시의 사회문제이자 여성문제의 현안인 축첩·이혼·공창 등 문제의 토의제안과 더불어<YWCA 창설안>이 가결되어 1922년 12월 9일에 “청년여자의 기독교적 품성을 계발하며 영적·지적·사교적·신체적 행복을 증진케 함”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를 김필례·유각경의 발기로 결성하였다.

 1차적으로 지방순회 책임자를 김필례로 선출하여 지방 조직을 서두르게 하였는데, 이것은 1921∼1922년의 지방 기독교 여성운동을 결집하려는 데서였다. 김필례는 이후 1년간 마산·부산·대구·청주·신천·평양·진남포·해주·재령·개성·인천·함흥·원산·목포·경성·광주 등을 순회하여 YWCA연합회기성회 가입을 독려하였다. 그 결과 1923년 8월 18일에 개최된 제2회 하령회에서 5개 도시 11개 학교의 대표 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가 정식으로 창립·발족되었다. 회장 유각경을 비롯한 기독교 여성계의 대표인 金承羅·辛義卿·金誠實·印福順·金英順·方信榮(이상 京城), 金聖姆(富川)·李善愛(大邱)·蔡光德(平壤)·황애시덕·趙淑景(開城) 등이 임원 및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기독교계와 민족주의계 여성계의 대표자들이었다.

 YWCA는 최초의 국제적인 여성단체였던 만큼 한국 여성운동이 국제사회로 진출하여 세계와 더불어 문화교류를 하는 한차원 높은 단계의 여성운동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의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YWCA의 활동은 밖으로는 국제적인 문화교류와 친선도모를 행하고 안으로는 수양회·하령회·금주금연운동·생활개선운동·공창폐지운동·물산장려운동·여성지위향상을 위한 각종 사회운동과 아울러 지방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 설치, 농촌계몽운동, 이재민구호 등의 사회사업 등 광범위한 여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들 활동에 대한 사회적 호응도 지대하였다. 아울러 YWCA의 여성운동은 기독교적 여성운동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사회로 확대, 개방하여 갔다. 1926년 이후 조선일보사의 후원으로 懸賞女子歌鬪大會를 지속적으로 한 것은 여성의 사회참여의식을 고취한다는 점에서 항상 성황리에 행사되었으며, 이것을 통해 YWCA 여성운동의 광범위한 지지세력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의 운영은 12명의 이사들 및 회장급인 총무와의 협의를 거쳐 민주적으로 사업진행을 하였고, 15세 이상이면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1925년 말 당시 회원 총수 201인이며 회원들의 직업은 교원(47명)·교역자(30명)·간호부(4명)·의사(4명)·노동직업부인(22명)·외국유학생(9명)·학생(6명)·외국여선교사(12명), 그리고 가정부인(67명)이었다.524)≪朝鮮日報≫, 1925년 12월 24일,<가정부인:경성에서 활동하는 여자단체>(끝). 여성엘리트가 가장 많이 참여한 규모가 큰 단체였다.

 여성교육이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에 역점을 둔 단체는 아니나,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도 기독교 여성들에 의하여 활동된 국제적인 사회단체였다. 절제회 활동내용은 일반인의 건강과 사회적으로 올바른 기풍을 세우기 위한 금주단연운동으로, 1923년 6월 서양인 여선교사 삘링스 부인의 발기로 사업이 시작되어 단숨에 전국적인 규모의 단체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처음에 회관을 協成여자신학교 내에 두었다가 설립 2년만에 茶屋町에 독립된 회관을 설치하는 등 사업기반이 탄탄하였다. 1923년은 생활의 절제와 검소가 요구되는 물산장려운동이 전국적으로 일고 있던 때였으므로 이 절제회운동은 사회적 호응이 많아 설립 3주년에 회원이 3,000여 명, 지회수가 무려 60여 개에 달하였다.525)≪朝鮮日報≫, 1926년 12월 3일,<기독교여자절제회>. 사업의 주간은 총무가 맡았는데, 여성교육계와 기독교계의 신망이 높았던 孫袂禮가 담당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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