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3) 여성 경제의식 성장과 경제자립운동
  • (1) 부녀들의 조선물산장려운동

(1) 부녀들의 조선물산장려운동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한 후 일제 침략자본은 우리 민족의 생활권을 여지없이 잠식하였다. 민족의 자각이 촉구되던 3·1운동 이후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근대기업을 일으켜 자주·자립의 민족경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전개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평양 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이 결집하여 평양에 조직체를 결성하고 1922년 말부터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문을 통하여 조선물산장려 표어를 모집하고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는 지방 순회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이 운동의 기풍이 대중 속으로 확산되어, 1923년 1월에는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 강당에서 조선물산장려회의 전국적 조직체를 결성하였다. 이 운동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각 지역에서 가두행렬을 하였는데 이 행렬에 쓰는 會旗는 전국 8도를 의미하는 각 도 생산의 특산 포(충청도는 모시, 평안도는 亢羅 등)로 만들었다.526)≪東亞日報≫, 1923년 2월 7일,<特産物로 會旗>. 물산장려운동은 토산품 애용운동인 만큼 그 실천은 가정에서부터 행해져야 하므로 부녀들의 참여가 절실하였다.

 근대화과정과 일제 침략과정에서 부녀들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높아져 다양한 운동을 역사적으로 일으키고 참여하였던바 부녀들이 민족을 살리겠다는 이 운동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울의 중류 이상의 가정부인들인 李道·朴英子·崔永牙·李淑 등이 50여 명의 부인들을 모아 土産愛用婦人會를 발기하고 1923년 2월 5일에 서대문 민우회관에서 창립총회를 하였다.527)≪東亞日報≫, 1923년 2월 7일,<토산애용부인회>.

 이 부인회 참여인들은 가정부인·昌德宮內人, 그리고 간사·평의원의 이름에 불교도로 간주되는 부인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이 주부의 책임이란 데서 중견주부를 상징하여 회장은 72세의 沈貞澤을, 부회장은 53세의 중년 부인 洪鈺卿을 선출하였다.528) 동 부인회 임원은 幹事長 兼 財務 최영아, 副幹事長 박영자, 書記 이숙, 幹事 李淑子·이도·尹昌求·李仁淑·盧淑卿·金成培·金弘萬·金靜進華·文世完·李淑英·崔玄田·孫景海·朴世圭·李敬玉·金信福·李淑鐘, 評議員 柳善心華·南子玉·盧大慈心·金桂蓮·柳淸淨華·金大恩性·白無量數·安法花行·安昌秀·金慈悲월·盧大慈·朴貞淑·鄭圓覺性·金淸淨日·金淑卿(≪東亞日報≫, 1923년 2월 7일,<土産愛用婦人會>). 회장단을 이처럼 고령자로 선출한 것은 가정살림의 주관자가 주부라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또 사회를 이끌어 갈 주도세력이 사회의 중류층에 있다는 데서이다. 그들의 취지문은 전통적인 부인형 문장으로 표현이 장황하나, 문장이 극히 소박하다. 또 부인의 애국적 견지의 각성을 촉구하는 순박한 내용은 가히 모든 여성의 심금을 울리기에 족한 것이어서 신구여성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취지문의 내용을 간추리면 ① 거미나 개미나 까마귀도 제 살 경륜을 스스로 하는데 우리 조선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의복과 살림살이 모든 것이 남의 것이다. ② 이 책임은 첫째 우리 여성에게 있다. 우리 여성들은 나라꼴이야 어찌되던 철따라 능라주단을 몸에 두르고 있다. ③ 우리(中流婦人)가 생산에 직접 참여하고 가정경륜을 할 만한 지식 등은 없으나 우리의 토산을 입고 써야 한다. ④ 그러므로 우리 여성은 토산을 애용하고 용돈을 절약하여 민족을 일으키고 가정을 일으키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3월 4일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내 살림 내 것으로’, ‘자작자급’, ‘토산애용에 대한 여자의 책임’ 등의 동 부인회 강연회에는 무려 2,50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하는 성황을 보였다.529)≪東亞日報≫, 1923년 3월 6일,<土産婦人의 熱叫>.
≪신한민보≫, 1923년 3월 15일,<서울아낙네들이 물산애용회를 조직>.
이것은 여성들의 애국애족적 호응도를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다른 토산애용부인회로 美風會가 있었다. 미풍회는 金淑卿·李奭貞·李性來·梁根煥 외 50여 명이 발기, 창립한 것인데 토산애용부인회와 사업의 뜻이 같아 힘을 보다 굳게 하려는 뜻에서 두 단체가 하나로 통합하였다.530)≪東亞日報≫, 1923년 4월 15일,<兩婦人會合同>.

 土産愛用을 일상 삶 속에 실천 정착시키기 위하여 이 부인회는 구체적 사업으로 有限責任組合인 土産愛用婦人商會를 1924년 5월에 개점531)≪東亞日報≫, 1924년 5월 14일·6월 1일,<土産愛用婦人商會創立>.하였다. 이 상회는 창립위원 30명을 선거하고 자본금 1股에 10원씩 4만원으로 하되 제1회 불입금은 2만원으로 하여 사업에 착수하기로 하였고 그 이익금은 토산장려운동과 일반 자선사업에 쓰기로 하였다.

 또한 1920년대 여성운동은 이미 여성만에 의한 운동이 아닌 범사회적 차원의 운동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사회적 인식이 일어나게 되었다. 언론기관의 여성운동 후원이 그것이다. 歌鬪懸賞대회(≪朝鮮日報≫와 YWCA의 연합), 부인견학단 모집(≪朝鮮日報≫와 朝鮮女子靑年會의 연합), 신문사 주최의 시내 여학교 바자회 또는 부인 밤줍기(拾粟)대회 개최 등은 규문에 갇힌 부녀들에게 사회참여의 기회를 유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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