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3) 여성 경제의식 성장과 경제자립운동
  • (2) 여성의 경제적 자립활동

(2) 여성의 경제적 자립활동

 1920∼1923년의 여성운동은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민족운동을 주도해온 세력들 사이의 계층적인 통합을 이룬 민족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아울러 이러한 여성운동은 한말에 전개되었던 애국계몽운동에서 주장한 여성교육을 통한 국력 신장으로서의 여성운동이 국권회복을 지향하는 다소 새로운 여성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급진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청년지식여성층에서는 계몽적 여성교육운동만으로는 여성해방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첫 단계로 여성들에게 독자적 삶을 영위할 능력을 계발시키는 직업교육이 집중적으로 행해졌으며, 더 나아가 1924년부터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수용, 발전시켜 갔던 것이다. 단순한 여성교육운동이 아닌 전문직업여성으로서의 교육 및 그것을 추진할 여성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926년 1월 초에 조직된 경성여자미술연구회,532)≪朝鮮日報≫, 1926년 1월 25일,<京城女子美術硏究會>. 1924년부터 해마다 무료로 편물·수예·양재봉 등을 가르치는 조선부인기예사533)≪朝鮮日報≫, 1927년 5월 21일,<부인기예사의 수예강습>.등이 부인들의 직업교육을 수행하는 한편, 1928년 2월 13일부터 조선여자직업사를 창립하여 적극적인 직업활동을 하였다. 이 직업사의 창립 목적을 “여성의 계몽운동도 필요하지만 여자의 지위를 향상시키려면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므로 조선여자의 특장인 자수·조화·편물 등을 전문적으로 교수하여 조선부녀에게 직업적 사상을 고취하기 위함이라”534)≪東亞日報≫, 1928년 1월 17일,<朝鮮女子職業社>.고 하였다. 직업교육은 직업적 단련을 요구하게 된다. 경성여자미술학교 학생들도 학교에서 배운 자수와 수예품들을 실지로 제조, 판매하고 직업적으로 단련하기 위하여 자본금 1만원의 주식회사를 만들어 1927년 4월 1일부터 개업키로 하고 朝鮮女子實業社를 발기, 창립하였다.535)≪朝鮮日報≫, 1927년 2월 19일,<女子實業社>.

 여성의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대표적인 조직으로 1927년 4월 29일 발기한 女子興業社를 보면 규모를 제대로 갖춘 勞使화합의 여자주식회사였다. 충남 예산에서 여성교육운동에 노력하던 尹松堂이 14인의 유지를 모아 서울 명월관에서 “조선여자는 경제적 해방을 받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의미에서 여자 자활방침의 하나로 방적·기예 등 여자에게 적당한 공업기관을 설치하자는 여자흥업사를 발기하였다. 이는 여자에게 직업을 주어 여자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보장토록 하기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 것으로 이 운동을 지방에 한하지 않고 전 조선적으로 할 것을536)≪朝鮮日報≫, 1927년 5월 31일,<有志 15人이 女子興業社發起>·6월 4일,<女子興業社 發起總會>. 구상하였다. 윤송당은 1927년 4월 1일 발기인 총회에서, 총자본금 1만원(1주 5원, 총 2,000주)에서 발기인이 2,000주를 출자하는 여자에 의한 새로운 성격의 기업을 기획한 것이다. 그렇다고 남자의 출자를 거부한 것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 남자 감사도 허락한다고 하였다. 역원의 선거·피선거권 및 의결권은 출자액에 관계없이 평등하며, 순연한 출자자는 甲部 사원, 노력제공의 직공은 乙部 사원으로 하되 그 권리를 동등하게 하였다. 이것은 노사간의 동등한 권리를 생각한 것이다.

 발기인은 姜信淑·金淑卿·윤송당 외 12인이며, 이 밖에 남자 7인을 합하여 22인이었다. 공장은 윤송당이 예산에 설립, 운영하였던 여성기업장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 공장의 규모는 직조기계 30여 대, 양말기계 8대에 40여 직공이 일하였다. 일반 직공은 工友라 하고 작업시간 외로 반드시 2시간씩 보통학과·자녀교육·가정경제·요리법·사회상식을 교수하여 일과 배움을 함께 하였다. 이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지적·경제적 능력을 겸비케 하려는 것이었다.

 일요일은 반드시 휴업하여 공우들을 휴양케 하며 이익의 4분의 1은 일반 공우에게 임금 외로 배당하고 3년간 잘 다닌 공우는 특별 공우로 인정, 퇴직 후에도 가정기업을 하게 하여 그에 소요되는 기계와 원료 등을 공급하고 생산품을 수탁, 판매하도록 소개해 주었다.537)≪朝鮮日報≫, 1927년 6월 9일,<女子興業社>.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립적 관계가 아닌 평등한 상호공생적 관계를 갖고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 목표를 두었다.

 조선여자흥업사는 열악한 근로조건과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저임금과 인간 이하의 대우 등으로 인하여 자본가를 상대로 하는 공장파업운동이 잇달았던 당시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사회계급적 갈등을 가장 원만하게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창립된 것이다.

 직업여성의 경제독립 의식과 직업여성 사이의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朝鮮女子職業組合·望月俱樂部와 같은 전문직 여성단체도 조직되었다. 전자는 “여자의 해방문제는 여자의 노력문제요 활동문제이며,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활동을 위한 여성의 직업장려”538)≪朝鮮日報≫, 1926년 5월 17일,<朝鮮女子職業組合>.의 목적으로 여성동우회 회원인 宋惠淑·白信愛·蔡敬天·李貞姬 4인이 1926년 5월 16일에 발기하였다. 발기인들은 재봉침을 놓고 노동복·학생운동복·여자개량복·사무복 등을 제작하여 동조합과 시내 및 상점과 행상원에게 팔게 하였다. 즉 사회주의 여성들의 직업활동인 것이다.

 이에 비하여 직업 여성들의 친선을 도모하여 조직되었던 망월구락부는 창립 1주년이 되는 1926년 음력 12월 15일(양력 1927년 1월) 오후 7시에 교사·기자·유치원 보모·산파·전도부인 등 전문직 여성 30여 명이 인사동 태화여자관에 모였다. 이들은 구락부의 사업확장책을 여러 가지로 논의한 끝에 사교기관으로서의 활동을 벗어나 더 의미 있는 회합으로 발돋음하자는 발기를 하였다. 이에 발기인으로 홍애시덕·김또라·김고라·김활란·문인순·손메레·유현숙·곽성실·윤귀련·백경순·이계영·황신덕·박흥순·방신영·안메레·정종명·김명순·김영순·김순영·이은경·최은희 등539)≪朝鮮日報≫, 1927년 1월 20일,<望月俱樂部를 中心으로 職業婦人團體組織>.이 선출되었다. 망월구락부 발기에는 확실한 직업을 가진 황신덕·정종명과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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