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4)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대두와 확대
  • (1) 조선여성동우회의 조직과 활동

(1) 조선여성동우회의 조직과 활동

 1924년 5월 4일에 발기하고, 10일에 창립총회를 개최, 23일에 발회식을 거행한 조선여성동우회541) 회명을 처음에는 京城女性同友會라고 하였던 것을 단체의 활동범위를 넓히고자 조선여성동우회로 변경하였다(≪朝鮮日報≫, 1924년 5월 13일,<女性同友會發會式은>) .는 우리 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을 주장하며 서울에서 창립된 여성단체이다.542) 社會主義女性解放論은 1922년 1월에 창립된 無産者同盟(발기인:金翰·元友觀·진병기·申伯雨·尹德炳·李準泰·李英·白光欽·朴一秉)에서 無産階級의 生存權 기초확립과 더불어 婦人解放運動을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따라서 계급적 내지 경제적으로 완전한 해방을 期케 할 일을 제시하고 있다(T.Y.生,<社會運動團體의 現況>,≪開闢≫, 1926년 3월호, 44∼56쪽).발기인은 朴元熙·鄭鍾鳴·金弼愛·丁七星·金賢濟·洪順卿·吳壽德·高遠涉·禹奉雲·池貞信·朱世竹·金聖之·許貞淑·李春壽였다. 창립총회에서 허정숙·박원희·주세죽을 집행위원으로 선거하였는데, 이들은 여성동우회의 중요멤버들이며, 우리 나라 사회주의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林元根·朴憲永·金思國의 부인들이다. 즉 허정숙의 남편은 임원근이며, 주세죽의 남편은 박헌영, 박원희의 남편은 김사국이었다.

 박헌영과 임원근은 상해 기독교청년회 부설강습소에서 영어를 배우면서(1920년 9월 이후) 알게 된 절친한 친구 사이이며, 역시 영어를 배우던 허헌의 딸 허정숙과 임원근은 열렬한 연애를 하였다. 이때 허정숙이 피아노 공부를 하고 있던 주세죽을 박헌영에게 소개, 열애 끝에 결혼하였다. 박헌영·임원근은 상해에서 공산당에 입당하고 고려공산당청년동맹을 조직한 후 이론학습에 열중하였다. 박헌영은 극동인민대표자회의(1920년 가을, 모스크바) 등 국제공산당대회에 참여하면서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543) 박갑동,≪朴憲永≫(인간사, 1983), 45∼47쪽.

 조선여성동우회가 발기되기 전인 1924년 4월 12일에 국내에 세력기반을 갖고 있던 김사국계의 서울청년회와 해외유학생이 주류를 이루는 박헌영계의 신흥청년동맹이 국내 청년단체의 통일적 조직체를 만들고자 서울에서 조선청년총동맹을 창립하였다. 이 대회에는 전국 600여 청년단체 중 223개 단체의 3만 7,15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회에서는 청년의 조직단체에 민중적 정신을 고무하고 계급적 의식을 주입함으로써 그 필연의 조정을 밝게 하는 것을 근본방침으로 하고, 교양선전·노동·부인·교육문제 계몽을 솔선하기로 운동방침을 세웠다. 사회주의 이념 아래 20∼30개의 단체가 하나로 뭉쳤다는 것은 한국청년운동사에 있어서도 괄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성동우회 발기인들 대부분(김필애·박원희·주세죽·우봉운·허정숙·고원섭 등)이 바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신흥청년동맹측의 허정숙·주세죽과 서울 청년회측의 박원희 3인이 중심이 되어 동 대회에 참가한 서울 및 각 지방 여성대표를 결속하여 조선여성동우회를 발기, 창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 후 조선여성동우회 발기인들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추진하는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조선여성동우회의<선언문>과 강령은 종래 여성운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회주의 계급투쟁 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들의<선언문>과 강령은 다음과 같다.544)≪槿友≫(창간호), 3∼4쪽.

<선언문>

 역사의 진전은 인간사회현상에 쉬지 않는 전환을 고한다. 원시시대에서 노예와 봉건시대로 자본주의시대까지 그리고 자본주의시대도 최후의 치명적 모순에 달하여 사회조직은 벌써 그 저편으로 불가피의 전환을 하려 한다. 따라서 여성의 지위와 생활도 여러 가지 역사적 변환을 계속하였다. 원시의 참된 인간인 여성에서 일종의 退化와 무교육과 노예생활의 구렁텅이로만 타락을 당하여 왔다. 尤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성의 다수를 노동과 성의 시장으로 驅出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완전히 자본의 사슬과 남성의 횡포한 권력에 얽매인 이중 노예의 무참한 消印을 맞고 말았다. 이것이 즉 소유권을 기초로 하고 남성이 우월권을 행사하는 이 자본주의 조직에서의 필연적인 산물인 무산여성이다. 이 현대 여성생활을 대표한 여성은 소위 지배계급인 유산자인 남성에게 여지없이 인권의 유린을 당하고 건강과 생명은 그들에게 희생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무산여성을 혹사하고 저렴한 賃銀으로 과도한 노동을 강요함으로써 (무산)계급자녀의 심신을 劣弱케 하여 전계급의 쇠퇴를 催促하며 멸망케 沈淪케 할 뿐이다. 그들의 전횡은 여성의 교육을 거부하고 모성을 파괴하였다. 그리하여 여성에게는 가정과 임은과 성의 노예적 지위가 있을 뿐이요 경제적 요점 생산의 중요한 역할을 이행하는 보수로 飢寒과 굴욕과 질병과 夭死를 받을 뿐이다. 더욱이 조선에 있는 우리 여성은 보다 더한 굴욕적 생활을 하는 동시에 특수를 가진 동양풍 도덕의 질곡에서 운다. 그러나 사회진화의 법칙은 여성으로 하여금 영구히 이 비인간적 함정에서 울고만 있게 하지 않는다. 엄연히 이 과학적 법칙을 앞세우고 여성은 벌써 일어났다. 천하의 (무산)군중은 이 불합리를 합리로의 운동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兩性을 공통한 전(무산)계급의 행동이다. 더욱 이중의 굴욕을 받는 여성은 이중 반역의 소리를 이에 加添하여 높이 외쳤다. 빵과 자유를 절규하면서 冬宮에 殺到하여 (전무산)민중해방의 첫 炬火를 든 여성의 역사적 행동을 우리는 잘 기억한다. 얼마나 굳은 자각 하에 단결한 여성의 위력을 말한 것이며, 승리의 필연성을 얼마나 잘 증명한 것이냐? 빵이 없는 자여! 비인간적 생활에서 운 여성이여! 분기하자! 그리하여 굳게굳게 결속하자! 우리와 이해가 많이 공통되는 군중과 제휴하자! 그리하여 지배계급의 男權을 철폐하고 자본의 毒牙에서 우리를 끌어내자! 우리의 참된 활로는 이것이 첩경인 동시에 또 오직 하나인 길이다! 자유의 미래를 고하는 黎明의 鐘聲은 여난다!

  

<강 령>

 1. 본회는 사회진화법칙에 의하여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立할 일군의 양성과 훈련을 기함.

 1. 본회는 조선여성해방운동에 참가할 여성의 단결을 기함.

 위에 제시된 선언문은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로부터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베벨(August Bebel, 1840∼1913)에 이르는 사회주의 중심사상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베벨은≪여성과 사회≫545) August Bebel, 선병력 역,≪여성과 사회≫(한밭출판사, 1982), 16쪽.에서 “여성은 노예의 일에 종사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이른바 노예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노예였다”고 하였다. 여성노예론은 여성이 해방되어야 할 강력하고도 합리적인 立論인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여성노예론에서 출발하였다. 마르크스는 여성해방을 性의 자유와 연결해서 생각했던 푸리에르의 사상을 인정하되, 한걸음 나아가 이상주의적인 도덕적 훈계의 차원에 머물렀던 푸리에르의 사상을 활용하고 변형시킴으로써 여성차별을 인류역사에 대한 철학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546) August Bebel, 선병렬 역, 위의 책, 48쪽. 또 엥겔스는≪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마르크스의 중심사상을 받아들여 인류의 역사발전단계, 사유재산과 계급사회의 출현, 결혼과 가족구조의 변화, 부권제 역사와 성차별주의의 기원 등을 유기적 연관선상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인류역사의 발달과정을 가족구조와 연결시켜 혼인형태를 네 단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제4단계에서 재산의 사유화는 재산상속·관리를 남성에게 부여하는 일부일처 가족이 형성되고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로 간주하는 가부장권제가 탄생하며, 분업이 시작되어 생산수단 담당자인 남성이 가사 담당자 여성을 억압하게 된다고 했다.

 “모든 사회적 존속과 억압은 피압제자와 압제자에 대한 결론적 종속에 기인하다”고 한 베벨은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근본적 조건으로 여성의 모성적 기능인 생물학적 기능을 더 논하고 있다.

 조선여성동우회의 선언문에서는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첫째 사회주의의 보편적인 여성해방사상으로서의 “가정·임금·성의 노예론”과 “교육의 거절 및 모성의 파괴론”을 제시하였고, 둘째 동양적 및 한국적 특수성으로서의 “동양풍 도덕의 질곡”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여성을 지배·착취당하는 무산계급으로 규정하고 지배계급이며 유산자, 즉 자본가 남성은 바로 무산계급인 여성이 대적하여야 할 존재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강령에서 선언문보다 더 분명하게 “사회진화법칙에 의한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여성해방운동임”을 보다 명백히 제시하고 있으며, 이 운동을 위해 전 여성은 굳게 ‘결속’(宣言文)하고, ‘단결’(綱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단결’이란 어휘에는 약자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투쟁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투쟁적 여성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하게 들어나 있는 것이다. 李光洙는≪東光≫ 1931년 4월호에서<단결 공부>란 제목으로 단결의 의미를 정의하고 그 실천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 서두에서 “새로운 문화를 건설한다든지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려는 민중이나 민족에게 단결은 전부다. … 아마도 현재처럼 단결이라는 전술이 보급되고 또 체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과거에는 없었을 것이다. 크게는 러시아의 공산당, 인도의 국민당, 중화의 국민당, 작게는 각종 노동자단체·농민단체 등 이른바 투쟁의 필요에 있는 자는 모두 단결의 전술을 쓴다. 단결은 진실로 모든 전술 중에 기초가 되는 전술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단결’이란 투쟁의 필요가 있는 자의 전술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1924년 5월 23일 밤에 거행된 조선여성동우회발회식의 광경에서 그 대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발회식에 참석한 사람은 약 80명 가량이었다. 그 중 50명은 축하차 또는 방청으로 참석한 남자들이었고 약 10명은 감시 경찰이었으며, 여자는 발기인이자 간부인 13∼14명 밖에 없었다.

 이같은 광경을 본 여성잡지≪신여성≫의 기자는 1924년 6월호에서 “시간은 훨씬 지났다. 그러나 손님이 와야지 방청의 한 사람이지만 간부 이상으로 가슴이 간지럽다. 여성동우회가 아니라 남성동우회 같다”는 조소 섞인 비판을 하고 있다.

 발회식 날 온종일 비가 왔으므로 참여자가 적을 것을 예상했었으나,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 이외의 여성은 1명도 참여하지 않은 셈이었다. 발회식에 참여한 50여 명의 남자들은 거개가 사회주의운동자들이었다. 개벽사의 金起田, 사회주의사상 단체를 조직하여 핵심적 활동을 하고 있던 朴一秉·李廷允·白光欽·金永淑 등이 있었으며547)≪朝鮮日報≫, 1924년 5월 22일,<女性同友會發會式>., 평양의 五月會, 대구의 商微會, 서울의 신흥청년동맹 등에서 축전·축문을 보내왔다. 이에 비해 민족주의계 단체에서는 발회식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또 축전·축문도 보내지 않았던 듯하다.

 조선여성동우회의 운영은 7명의 집행위원과 2명의 상무간사가 있어 이들이 일반 사무를 처리하고 매년 3월 8일에 정기총회를 열고 집행위원들의 보고에 따라 사업을 가결한다. 그러므로 총회는 본 회의 최고기관이 된다. 회의 경비는 입회금(50전)과 月捐金(20전) 및 특별 의연금으로 충당된다. 회원은 창립 당시 18명548) 18명 중 발기인은 14명임.이었으나, 1925년 말 현재 73명으로 늘어났다. 회원 연령은 20∼26세가 가장 많았다. 회원들의 직업은 서울의 각 여학교를 비롯하여 러시아·중국·일본 등지의 유학생들까지를 포함하는 학생이 가장 많고, 의사·간호부·산파·교원·기자·직공·가정부인 등549)≪開闢≫(1926년 3월호), 49쪽.이었다.

 사회진화법칙에 표준한 새 사회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활동 등으로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의식을 깨우치기 위하여 여성문제에 대한 강연회들을 서울과 지방에서 개최하고 연구반을 조직하여 매주 1회씩 부인문제에 관한 서적을 읽고 토론하였고 국제부인데이를 기념하기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 또한 정미소·비단회사·고무공장 등에서 임금 착취·성차별·민족차별 등으로 고생하는 여자노동자들을 위한 위로음악회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수재피난민과 같이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손길이 되기에도 노력하였다.550)≪朝鮮日報≫, 1925년 12월 21일,<가정부인:경성에서 활동하는 여자단체(5)>. 그러나 그들의 사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회의 목적을 위한 국제부인데이강연회나 여성문제강연회 등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금지조처를 당하기 일쑤였다. 1926년 4월 1일 황해도 재령에서 재령청년회·무산청년회와 연합으로 여성문제대강연회를 개최했을 때 李道別·조원숙·정종명의 열변은 만장의 청중들로부터 수없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임석한 일본 경찰이 여러번에 걸쳐 ‘주의’·‘중지’를 하더니 드디어 해산명령을 내렸다.551)≪朝鮮日報≫, 1926년 4월 4일,<注意·中止·解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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