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4)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대두와 확대
  • (2)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분파적 확대

(2)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분파적 확대

 1925년에 국내 사회주의운동은 김사국이 주도하는 서울청년회파와 일본 유학생 중심의 북풍회파552) 원명은 北星會·一月會로 東京에서 사회주의 계몽운동을 목적으로 金昔水·卞熙瑢·李如星 등이 조직하였다(≪東亞日報≫, 1925년 1월 20일).로 크게 분파되어 있었는데, 국내 세력기반으로는 서울청년회파가 강세였다. 당시 여성동우회는 북풍회파 계열이 우세하였다. 1925년 이후 국내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이들 파벌과 연계를 가지며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아울러 새로운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이 다수 조직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여성운동자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 결과적으로 조선여성동우회 출신들이 각기 다른 단체를 조직, 활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5년 1월 17일에 시천교당(堅志洞)에서 신·구 여자 50여 명이 모여 여성해방동맹 창립준비를 위한 토의회를 열었다. 이들이 내건 취지는 “종래 우리 여성단체는 일반으로 보아 신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편벽한 폐해가 적지 않았으므로 구식 가정여자의 자각과 교양을 힘쓰자”553)≪朝鮮日報≫, 1925년 1월 20일,<여성해방동맹>.는 것이었다. 신여성을 부르주아적 여성으로 간주하여 이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였으나, 그들은 봉건질서에 압박받는 구식 부녀의 해방까지를 아우르는 여성해방운동을 사회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추진하려는 의지를 가졌던 것이다. 여성해방동맹의 발기는 조선여성동우회의 발기인이었던 김현제와 천도교 부인계의 지도자인 朱鈺卿 등 신·구 부인들이 1925년 4월부터 준비하였으며, 정식 창립대회는 1926년 1월 3일에 조선노동회관554)≪東亞日報≫·≪朝鮮日報≫, 1925년 1월 3일,<여성해방동맹의 창립총회>.에서 개최하였다.

 발기 이후 활동이 미미하여 사회주의 여성단체로서의 성격이 여실히 부각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창립총회에서 여성해방동맹의 명칭을 ‘프로여성동맹’으로 개칭한 것은 사회주의 여성운동노선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직으로는 서무·교양·경제·보건의 4부를 두고 집행위원 6인(玄愛羅·木不松治·金正玉·金永信·張寶華·宋惠國)을 선출하였다. 규약 통과 후 제1회 총회에서 실행의안으로 ① 여성운동선 통일에 관한 건, ② 남자의 전제압박에 대한 건, ③ 여자교육 및 혼인에 관한 건, ④ 부인노동자의 임금에 관한 건, ⑤ 기관지 발행의 건, ⑥ 직업부인 조사의 건, ⑦ 미신타파의 건 등을 제시, 결정하였다.

 프로여성동맹에 비하여 京城女子靑年同盟의 창립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에서 주목할 만하다. 1925년 1월 21일 조선교육협회(수표동) 내에서 여성동우회의 중심인물이며 북풍파와 인맥이 연결되는 여성들이 경성여자청년동맹 발기총회를 개최하였다. 발기인은 朴貞德·鄭達岳·韓東竹·趙寶姬·金隱谷·허정숙·우봉운·金弼順·주세죽·裵赫秀·金祚伊 외 5인이며,555)≪朝鮮日報≫, 1925년 1월 20일,<女子靑年同盟>. 집행위원은 허정숙·주세죽·김조이·정달악·박정덕·배혁수·김필순556)≪朝鮮日報≫, 1925년 1월 22일,<京城의 女子靑年同盟>.이다. 이 단체는 일제의 주목을 받아 총회에서 임석 경찰에게 강령을 압수당하고 일반 공개를 금지한 후에야 겨우 개회할 수 있었다.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창립 후 첫 사업으로 국제부인데이 기념간친회(1925. 3. 8)를 열고, ① 국제부인데이의 의의를 널리 선전하여 이른바 무산인으로 하여금 이날을 기념케 하고, ② 세계 무산부인운동가의 전기 발간 등을 결의하였다.557)≪東亞日報≫, 1925년 3월 10일.
≪開闢≫(1926년 3월호)에 게재된<社會運動團體의 現況>참조.
이것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한국 내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세계 무산부인운동으로 추진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며 동시에 북풍회 및 경성여자청년동맹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정통성을 갖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주축인물인 주세죽·허정숙 및 曺奉岩의 처 김조이 등이 국제공산주의운동과 연계되는 남편들의 화려한 배경에 힘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1925년 11월 박헌영이 신의주사건으로 피체되어558) 박갑동, 앞의 책, 47쪽. 그 처의 활동이 제한되고, 허정숙은 임원근과 헤어진 후 宋奉瑀와 새로 동거하느라 경황이 없고, 金丹冶의 애인 고명자는 1925년에 이미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버리고, 회원 정칠성은 동경 기예학교에서 수학하는 등의 사정으로 인하여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1926년 3월 4일에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상무집행위원회를 열고, ① 3월 8일의 국제무산부인데이를 조선여성동우회와 연합 개최하고, ② 3월 10∼17일을 부인주간으로 정하고, 일반 부인의 자각 촉진을 위해 야간에 부인문제 통속강좌559) 부인문제 통속강좌 내용 및 강연자는 다음과 같다.
① 3월 10일, 배성룡, ‘조선부인문제의 실제문제’.
② 3월 11일, 배성룡, ‘조선부인문제와 결혼문제’.
③ 3월 12일, 배성룡, ‘조선부인문제와 경제적지위’.
④ 3월 13일, 金璟載, ‘부인문제의 개론’.
⑤ 3월 14일, 金璟載, ‘부인문제의 사회적 지위’.
⑥ 3월 15일, 金璟載, ‘조선부인의 사상적 지위’(≪朝鮮日報≫, 1926년 3월 11일).
를 개최하고, 주간에는 회원들이 독서를 하고 또한 저임금에 신음하는 직업부인을 위문할 것을 정하였다. 조선여성동우회와의 연계사업으로 활동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을 보였던 것이다.

 조선여성동우회 창립자이며 열렬한 사회주의 여성운동자 박원희도 여성동우회를 떠나 독자적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하였다. 그는 30여 명의 사회주의 여성운동자를 결집하여 1925년 2월 21일에 새로 경성여자청년회를 창립하여 착실한 활동을 수행해갔다. 집행위원은 金繡準·文貞愛·朴春子·박숙자·이정숙·박원희·金淑貞560)≪朝鮮日報≫, 1925년 2월 23일,<京城女子靑年 새로이 회를 조직>.등이며, 회장은 박원희였다. 회원은 경성여고보·진명·숙명·이화·근화학교 학생들이 가장 많고 그 외로 가정부인·노동부인들도 있으며, 가정부인들은 가정에서 주어진 독서를 한 후 연구회가 열릴 때에 출석하여 토론을 하였다.

 회의 강령은 ① 부인의 독립과 자유를 확보하며 모성보호와 사회상에 대한 남녀지위평등의 사회제도 실현, ② 부인해방에 관한 사회과학상의 교양을 분명케 하며 이를 보급하고자 함561)≪東亞日報≫, 1925년 1월 8일.이었다. 강령에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전개해야 할 과학적 이유와 사회주의 경제발전이론에 입각한 여성해방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활동으로는 부인강좌(1925년 9월 12일에 개최한 ‘조선부인과 구라파 부인’)·국제부인데이 기념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여성들의 사회주의 의식을 높였다. 1926년 1월 13일≪조선일보≫의 후원으로 개최한 신춘여류대강연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강연회에는 유영준·박원희와 더불어 일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인 스미이 요시에(住井美江)가 초청되었다. 이는 일본 사회주의 여성운동과의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1926년은 사회주의 등장 이후 좌·우로 분파되었던 국내외의 항일민족운동 노선을 통합하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국내 여성운동계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으며, 경성여자청년회 주최로 1926년 11월 14일 오전 11시부터 동 회관(원동 221번지 소재)에서 재경부인운동자 간친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조선여성동우회에서 이현경 외 12명, 경성여자청년동맹에서는 심은숙 외 12명, 경성여자청년회에서는 박원희 외 8명, 도합 33인의 부인운동자들이 모여 임시席長 박원희의 사회로 조선부인운동자의 통일방침과 기타 사항을 논의하였다.562)≪朝鮮日報≫, 1926년 11월 15일,<부인운동자의 간친회>. 부인운동의 통일과 조직에 노력하자는 논의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막혔던 장벽을 허물고 흉금을 털어 놓듯한 자세로 논의를 거듭한 끝에 먼저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을 합동하기로 하고, 합동총회준비위원으로 이현경·황신덕·강아그니아(이상 조선여성동우회), 조원숙·심은숙·김정은(이상 경성여자청년동맹), 박원희·김수준·신기숙(이상 경성여자청년회)을 선출하였다.563)≪朝鮮日報≫, 1926년 11월 16일,<조선여성운동자의 통일전선작성>. 이들의 준비로 마침내 12월 5일 두 단체가 통합하여 새로이 중앙여자청년동맹을 탄생시켰다.

 그러면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의 활동은 어떠하였는가. 1925년에 여러 개의 사회주의 여성단체가 조직, 활동하면서 조선여성동우회의 중요회원들이 빠져나가 자연히 활동이 저조하였다. 이에 1926년 3월 3일 밤 조선교육협회에서 개최한 제2회 정기총회를 통하여 활동면목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회원 56명이 출석한 총회에서 임시집행위원으로 정종명·주세죽·백신애·강아그니아(姜貞姬)를 선출하여 회의를 진행하였다. 이 회에서는 여자청년운동·농촌부인·직업부인·가정부인의 문제, 여학생운동·형평여성·지방여성의 문제, 무산여성교육·공창여성의 문제, 여성운동통일·전조선여성운동자대회 개최, 지방순회강연·부인주간·노동부인위안음악회 개최 등 여성문제 전반에 걸친 것을 선별없이 결의하였다. 그리고 정종명·주세죽·盧順烈·金晶·백신애·金英禧·조원숙을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차총회에서 결의한 사항들은 너무나 광범위하였다. 이것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향후 방향을 밝혀준다는 점에는 의의가 있겠으나,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실행해 나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건들 가운데 여성운동의 통일화 또는 전조선여성운동자대회의 개최와 같은 것은 여성운동의 지향할 바를 올바로 제시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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