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4)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대두와 확대
  • (3)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지방 확대

(3)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지방 확대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서울에서 바야흐로 활기를 띄던 1925년부터는 지방에서도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이 조직, 활동하였다. 지방의 경우 지방 청년동맹 등 사상단체들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고, 여공 활용이 많은 공장도시·항구도시와 같은 곳에서는 여성들 자신의 사회경제의식이 높아져 자신들의 생존권 쟁취를 위해 조직,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활동은 서울의 경우보다 경찰의 간섭과 탄압이 심하여 활동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지방 중에서는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서 비교적 일찍 사회주의 여성단체가 조직, 활동하였다. 인천에서 丁南玉·張玉蘭·孫丹 세 여성이 여자청년사상단체가 인천에 없음을 유감스럽게 여겨 1925년 11월 30일에 정남옥의 집에서 인천여자청년동맹 조직을 위한 발기위원회를 열었다564)≪朝鮮日報≫, 1925년 12월 2일,<仁川女子靑年同盟>.. 12월 6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논의하여 12월 5일에 경찰 당국에 집회허가를 신청하였다. 경찰측에서는 회명을 온건하게 학술연구회로, 또 강령의 “여성 운운”을 “여자”로 고치고, 이 회 사업에 “교양”·“훈련”이란 말을 고칠 것을 강요하고, 발기위원 중에 중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등의 트집을 잡아 허가를 해 주지 않았다.565)≪朝鮮日報≫, 1925년 12월 8일,<自鳴鐘>. 창립되기 전부터 경찰의 탄압이 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굽히지 안고, “남자청년회를 인정한 이상 경찰측은 여자청년회도 허가해야 한다”566)≪朝鮮日報≫, 1925년 12월 8일,<女靑同盟難産>.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경찰과의 교섭 실강이 가운데서도 인천여자청년동맹은 활동목표를 세우고 계속 활동하였다.

 1926년 1월 7일에는 시내 외리에 있는 노동학원 안에서 신년간친회를 하고자 준비하는 중 인천경찰서 고등계 주임 이하 전원이 현장에 달려와 간친회장이라고 쓴 종이를 찢고 무조건 해산을 명하고 “인천여청”이라고 도장 찍힌 과자봉지와 프로그램을 압수하고 장내에 모인 사람을 한 명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위원 손단 외 2명을 연행하여 심문을 하였다. 사상단체를 시인하지 않겠다는 경찰측의 탄압에 대하여 손단은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항의하였다.

이번 일은 너무나 무리한 압박입니다. 원래 인천여청은 세간이 다 아는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인천서에서는 인천의 여성단체는 인정치 않겠다고 어리벙벙한 수작으로 누르려고만 하니 대관절 집회 금지인지, 해산인지 분간할 수 없다(≪朝鮮日報≫, 1926년 1월 9일,<仁川女靑의 懇親會禁止>).

 지방 사회주의 여성단체에 대한 경찰의 탄압은 심하였다. 목포여자청년회에서 1925년 4월부터 일반 무산부녀를 위하여 여자야학을 경영하여 30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그런데 당국에서는 무산부녀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다행히 학교평의원 金源喜의 노력으로 원만히 해결되었다.567)≪朝鮮日報≫, 1926년 2월 26일,<三百名女學生 解散命令>. 1926년 4월에 조직하여 사업활동을 추진하던 靈岩소녀회의 경우도 강령과 간부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해산명령을 받았다.568)≪朝鮮日報≫, 1926년 7월 30일,<小女會까지 解散命令>.

 양반의 고장이며 여성차별이 심한 안동에서도 사회주의 여성단체로서의 좌표를 가진 안동여성회가 1925년 11월 7일 저녁에 李基賢·朱錦卿·金美哉의 발기로 창립총회를 열어 선언·강령·규약을 통과시키고 집행위원 9인을 선출하였다. 그들이 채택한 선언문은 “여성과 남성은 동일한 인간이다. 다 같은 인간으로서 불합리한 도덕과 계급적 제도의 지배를 받아 오늘까지 비참한 역경을 겪어 왔다. 여성도 인간인 이상에는 남성의 전횡적 제재를 절대로 받을 수 없다. 죽음의 구렁을 벗어나 광명한 사회에서 생활하자. 모든 여성들아 분기하여 단결하자”569)≪朝鮮日報≫, 1925년 11월 11일,<安東女性의 新旗幟>.는 것이었다. 철저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인 것이다.

 신사상의 여성해방론은 지방 곳곳에서 환영받았다. 여성문제 대강연회에서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제도하에서 절대노예에 처한 여성, 그리고 남성 중심주의의 법률·도덕과 현모양처주의는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토로하였다.

 만주·연해주와 연접하였고 새로운 문화와 사상에 대한 수용이 다른 지역보다 적극적인 관북지방에서의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보다 과감했다. 함흥여자청년회가 1926년 1월 18일에 동명극장에서 개최한 여성문제대강연회에 1,000여 명의 청중이 내도하였던 것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도가 높음을570) 이 날의 연사와 강연제목은 金景道의 ‘동무여 奮鬪하자’와 權明範의 ‘新進女性들에게’였다(≪朝鮮日報≫, 1926년 1월 21일,<女性問題大講演>). 보여주는 것이었다. 같은 해 11월 20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金德惠의 ‘현대여성의 사회적 지위’571)≪朝鮮日報≫, 1926년 11월 24일,<咸興女靑講演會開催>.라는 연제로 강연회를 개최했을 때도 1,000여 명의 청중이 운집하였다. 봉건적 여성억압을 식민지 여성억압정책으로 전환한 일제 치하에서 문화적·사상적으로 목말랐던 대중들에게 사회주의 여성운동론은 너무나 참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회가 있을 때마다 산촌 지방에 이르기까지 청중들이 구름같이 모였으며, 일제 사법당국은 이를 위험시하여 탄압하였던 것이다.

 함경도의 북청여자청년회는 여성문제대강연회 개최를 준비하던 중인 1926년 3월 27일에 북청경찰서로부터 금지당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이 청년회의 활동이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여성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1927년 4월 28일 임시총회에서 토의한 의안들은 보다 광범위하게 세력을 규합하여 철저하게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추진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들이 토의한 의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女靑에 관한 건:완전한 여성해방을 목표로 하는 무산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여성운동 선구자 양성에 필요한 토론회 등을 수시로 개최하고 사회진화 필연법칙을 일반에게 도서로 보급하며, 현재 여성의 사회적 입장과 경제적으로 참담함을 깨닫게 하고 남존여비관념을 타파하여 해방운동의 정신을 이해케 하며, 본 군내에 여청 단체를 조사하여 연합회를 발기할 일.

② 사상운동에 관한 건:전인류의 다수인 무산계급의 이익을 대표할 사상을 준봉하여 우리 운동의 지침을 삼기로 일반에 선전할 일(≪朝鮮日報≫, 1927년 5월 1일,<투쟁! 해방! 건설! 북청여자청년회>).

 端川의 여자동무회572)≪朝鮮日報≫, 1925년 2월 13일,<女子동무회 창립>.와 단천여자청년회,573)≪朝鮮日報≫, 1927년 8월 16일,<단천에서 女子靑年會>. 利原의 이원여자청년회574)≪朝鮮日報≫, 1925년 2월 12일,<利原女子靑年總會>. 등이 모두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로, 전국 여성운동을 통합한 근우회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도 지방에 따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독자적으로 수행하여 갔던 곳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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