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5) 근우회의 조직과 활동
  • (1) 근우회 조직의 배경

(1) 근우회 조직의 배경

 槿友會 조직의 배경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의 유입으로 인하여 항일민족운동노선이 좌·우로 분파되어 자주독립국 재건의 역량이 약화되었다. 이에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 점차 세력을 연합하였고, 마침내 1927년 2월에 민족유일당으로서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여성운동계도 민족유일당 운동에 보조할 새로운 운동을 하였다. 분파가 확대되어가던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은 점차 하나로 통합되었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유학생 출신 엘리트 여성들이 간친회라는 이름으로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회주의 여성운동계의 연합이었다.

 사회주의계 여성운동의 분파적 확대는 조선여성동우회의 존재를 약화시켰다. 그런데 1926년 봄 동경에 유학하였던 정칠성·황신덕·이현경 등이 귀국하면서 분파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통합과 조선여성동우회 활성화라는 새로운 전기를 갖게 되었다.

 기생 출신의 정칠성은 일찍이 남녀평등 실현에 대한 꿈을 갖고 17세 때 이미 여장부가 되고자 승마를 배운 여성이다.575)≪別乾坤≫(1927년 8월호), 58쪽. 3·1운동 뒤 홀연히 화류계를 떠나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 연구하였고 여성동우회 발기에 참여한 후 일본 동경기예학교에 유학하여 三月會를 조직, 활약하였다. 그는 여기서 사회주의사상의 이론적 기반을 착실하게 쌓고 1926년 봄에 귀국하였다. 황신덕은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 후 동경 일본여자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사회주의>라는 방대한 양의 논문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이론과 그 사상을 제시하였다. 노령 출신 강아그니아도 일본에서 귀국하여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 남편 정필원과 함께 사회주의운동에 힘썼으며 일제에 의한 공산주의자 일제 검거시에 피검, 투옥 생활을 하였다.

 1926년 11월 14일576)≪朝鮮日報≫, 1926년 11월 11일,<在京婦人運動者懇親會開催>·15일,<부인운동자의 간친회>. 경성여자청년회에서 在京 사회주의 여성운동자간친회를 열고, 사회주의 여성운동 통합의 첫문을 열었다. 당시≪조선일보≫는 “막혔던 장벽을 트고 가렸던 흉금을 헤치고 지금까지 여성운동의 소감을 말하여 종합한 결과 전조선 여성운동자의 통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깊이 느끼고 먼저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을 합동키로 결의하였다”577)≪朝鮮日報≫, 1926년 11월 16일,<조선여성운동자의 통일전선 작성>.고 보도하였다. 이 간친회에서 두 단체의 합동총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으로 조선여성동우회의 이현경·황신덕·강아그니아의 3인,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조원숙·심은숙·김정은의 3인 및 경성여자청년회의 박원희·김수준·신기숙의 3인을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0일에 경성여자청년동맹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주세죽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두 단체의 합동에 대한 승인을 결정하였다.

 합동총회는 12월 5일 오후 1시부터 천도교당에서 개최하고자 했으나 당국의 간섭으로 인해 여성동우회관에서 개최되었다. 회원 50명과 다수 방청인의 참석 아래 박원희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총회를 집행하였다. 그 결과 두 단체의 간판을 불사르고 새로 중앙여자청년동맹을 발족시켰다. 여기에서 집행위원으로 김수자·신기숙·심은숙·강아그니아·여영숙·박원희·곽형숙·노승준·김성인·김수준·조원숙을 선출하고 다음 사항들을 결의하였다.

① 본회가 한양청년연맹과 경성청년연맹의 통일을 위하여 조선청년동맹에 직접 가맹함을 3개월간 연기하고 두 단체의 동맹을 촉진키로 하여 촉진위원으로 김수준·조원숙·심은숙·박원희·신기숙 5명을 선정함.

② 부인의 교양 목적을 위해 연구반을 시급히 실시함.

③ 명년 1월 중순에 조선여성단체연합 대강연회를 열기로 함.

④ 명년 3월 신학년을 기하여 무산아동학원을 설립키로 하고 그 준비위원은 집행위원에 일임하기로 함.

⑤ 본회 발회식은 12월 21일로 정함.

⑥ 사무소는 당분간 조선여성동우회관을 사용함.

 (≪朝鮮日報≫, 1926년 12월 7일,<양여청의 합동총회>).

 결의사항에 나타나듯 두 단체의 통합은 조선내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적 확대에 목적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중앙여자청년동맹의 강령은, 첫째 “무산계급의 권리 및 여성해방을 위하여 청년여자의 단결과 분투를 기한다”, 둘째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한다”였다. 즉 이것은 청년여자에 대한 사회주의 의식확대 교육을 위해 대중교양에 힘써 지방 여자청년회를 비롯한 국내 여성운동 세력을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 흡수하려고 한 것이었다. 근우회가 조직되기 직전인 1927년 3월 8일에 조선여성동우회와 중앙여자청년동맹 연합으로 국제무산부인데이를 기념하는 대강연회578) 연제와 연사는 다음과 같다. ① ‘國際無産婦人데이의 유래’:朴元熙, ② ‘國際無産婦人데이를 기념하자’:鄭錫鳴, ③ ‘朝鮮婦人의 國際化’, ④ ‘國際無産婦人데이를 맞으면서 朝鮮女性에게’:李賢卿, ⑤ ‘國際無産婦人데이와 로서아혁명’:姜貞姬, ⑥ ‘3월 8일과 朝鮮女性’:朴新友, ⑦ ‘女子解放과 3월 8일’:羅純金.를 YMCA 강당에서 7명의 연사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개최하려다가 당국의 금지로 중단된 바 있는데, 그 강연회는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그 운동을 확대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그들의 운동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도층 여성으로부터 대중사회 여성까지를 아우르는 비교적 광범위하며 온건한 의식과 방법으로 여성운동을 전개하는 기독교 여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진영 여성운동과의 연합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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