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4. 형평운동
  • 1) 형평사의 창립배경

1) 형평사의 창립배경

 백정은 고려시대에는 일반 백성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북방계 유목민 출신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사회불안을 일으키고 있던 禾尺과 才人이 문제가 되자 이들을 양인 취급하였으나, 身役으로서의 군역을 의무화하지 않음에 따라 양인들과 구별하여 백정이라 부르게 되었다.589) 姜萬吉,<朝鮮白丁考>(≪史學硏究≫18, 1964), 491∼526쪽.

 조선왕조는 이들에 대해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시도하였으나 원래 영농민족이 아니었던 그들을 완전히 영농민으로 정착시키기는 어려웠다. 유목민 출신으로 육류를 주식으로 하였던 백정은 수렵만으로는 음식을 조달할 수 없어 자연히 가축을 도살하였으며, 나아가 전문적인 도살업자로 발전하였다. 또한 유목민적인 생활의 연장으로 초원지대를 따라 전전하던 그들은 늪지에 흔한 풀이나 나무를 생활방도로 이용하였으니, 곧 柳器를 만들어 판매하였으며 屠殺業·獸肉商과 함께 그들의 대표적 직업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의 직업은 특수화하였고 생활권도 달랐으며 자연히 사회적인 대우와 위치도 엄격히 구분되었다. 이들은 법적으로 無籍者일 뿐만 아니라 거주의 제한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는 관혼상제나 의식주 등에서 일반민과 다른 처우를 받는 등 비인도적인 역사를 살아왔다.590) 백정은 無籍者로서 백성의 자격이 없었다. 역대 법전 어디에도 取締上의 규정 이외에는 이들의 신분을 규정하는 조항이 없었다. 따라서 入學·科擧를 포함한 일체의 公權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병역이나 납세의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제한이 가해졌다. 기와집에 거주하는 것, 명주옷·笠子·網巾·宕巾·가죽신 등의 착용을 금지하는 한편 외출시에는 蓬頭難髮에 平凉子를 착용토록 강제되었다. 일반인 앞에서 흡연·음주가 금지되었고, 집안에서의 향연도 금지되었다. 관혼상제에서도 차별을 받아 상여를 사용하지 못하였고 묘지도 일반인과 같은 지역에 混在하지 못하였다. 혼인에도 말이나 가마 등을 사용하지 못하였고 여자는 결혼초부터 結髮을 금하였으며, 家廟도 엄금하였다.
교육에도 많은 제한이 행해져 근대적 교육제도가 도입된 구한말에도 구식 서당의 교육은 물론이요, 신식 학교교육에서도 차별이 심하여 백정 아동의 배척문제로 자주 분규가 일어났다. 사람들과의 교제에 있어서도 일반 어른에게는 물론 어린아이에게도 항상 복종하고 小人이라 칭하며 공경의 예를 행해야 했으며, 공공 집회장소에 허가없이 출입할 수 없었으며, 개인적인 용무로 일반인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문앞에서 禮를 행해야 했으며, 길에서도 일반인과 나란히 걸어 갈 수도 없었다. 특히 성씨와 이름의 사용에 차별이 심하여 성도 분명한 자가 별로 없었고 이름도 일반인과 구별되었다. 혹 성이 있을지라도 본관을 거의 알지 못하였고, 이름에는 仁·義·孝·忠 등의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고 대개 乭·萬石·億石·武劍·小介 등과 같은 종류의 이름을 써야 했다. 이러한 경우를 벗어나면 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마을 사람들이 합동하여 私刑을 가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車賤者,<白丁社會의 暗澹한 生活相을 擧論하여 衡平戰線의 統一을 促함>(≪개벽≫, 1924년 7월호), 42쪽.

 백정들은 이러한 봉건적인 차별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찍부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개항 이후 자유평등을 내세우는 서구문물이 들어오고 이미 여러 방면에서 사회·경제적 변화로 흔들려가던 봉건적 사회체제가 한층 급속히 와해되어 가면서 더욱 증가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신분제도에 대한 차별 철폐요구는 1894년에 시작된 동학농민전쟁시 동학농민군이 全州和約을 즈음해서 정부측에 제기한 弊政改革案 12조 가운데에 나타나 있다.591) 폐정개혁안 12조 가운데 신분에 관련된 조항은 다음과 같다.
一. 노비문서는 燒却할 事.
一. 七班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白丁頭上의 平壤笠은 脫去할 事.
이후 이 폐정개혁안 12조를 반영하여 개화파 金弘集 內閣時에 행해진 갑오개혁에서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법제적으로는 철폐되어,592) 宋炳基·朴容玉·朴漢卨 編,≪韓末近代法令資料集≫Ⅰ(국회도서관, 1970), 14∼20쪽. 백정을 포함한 천민의 신분해방이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의안은 단지 “驛人·倡優·皮工에게 免賤을 許한다”라고만 되어 있을 뿐 이들이 당시 받고 있었던 사회적 제약이나 차별대우 등에 대해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갑오개혁 이후에도 천민에 대한 사회적인 억압이나 통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으나593) 예를 들면 1896년 9월<호구조사규칙>이 반포되어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戶籍이 만들어져 등재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승려와 함께 별도로 호적이 작성되었으며, 또 직업을 ‘屠漢’이라고 기재하여 백정신분을 그대로 드러내게 하고 있었다. 갑오개혁 의안으로 해방되었다고 하는 깨달음은 백정들로 하여금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회적 차별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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