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4. 형평운동
  • 2) 형평사의 창립
  • (1) 형평사의 창립 과정

(1) 형평사의 창립 과정

 형평사는 백정들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단체의 힘으로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그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던 것은 백정들의 교육에서의 차별문제였다.594) 隆熙 3년(1909) 6월17일 內務警務局長 宋井茂이 統監 曾彌荒助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당시 백정에 대한 교육차별이 심각하여 백정들은 자제 교육을 위해 예수교에 귀의할 정도였다.
國史編纂委員會 編,≪統監府文書≫8(國史編纂委員會, 1999), 390쪽,<晋州에 있어서의 白丁出身 排斥 등으로 인한 脫敎者의 批難의 件>.
한 형평사원,<나의 추억>(≪正進≫창간호, 1925년 5월), 32∼33쪽.
그리고 이러한 백정의 교육운동은 전반적으로 1900년대와 1910년대에 행해졌던 부르주아적 교육운동의 조류에 속하였다. 이것은 형평사 창립을 주도한 인물들이 백정중에서도 자산가와 일부 선진 지식인이었다는 것과 연관된다.595) 형평사 발기인 가운데 이학찬은 백정자산가였고, 강상호는 일반인으로 초대≪동아일보≫진주지국장이었고, 신현수도 일반인으로 당시≪조선일보≫진주지국장이었으며, 천석구는 일반인으로 진주 자작농회 간부였고, 장지필은 백정으로 日本 明治大學 중퇴의 학력을 가졌다 한다.

 형평사 창립대회는 1923년 4월 25일 晋州의 大安洞에서 회원 8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먼저 형평사 趣旨書(主旨)와 社則을 채택하였다.

公平은 사회의 근본이고, 愛情은 인류의 本良이다. 그런고로 我等은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권장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기를 期함이 本社의 主旨이다(≪조선일보≫, 1923년 4월 30일,<晋州에 衡平社 發起>).

 위와 같은 형평사 주지라든가, “본사는 계급타파·모욕적 칭호폐지·교육권장·상호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는 형평사 社則 제3조, 이것이 바로 당시 형평운동의 목표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들이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평등과 해방 이것이 창립시부터 줄곧 형평사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운동으로서 야학·강습소의 증설, 신문·잡지의 구독, 강연 등을 통하여 스스로의 개발을 도모하기로 하였고, 酒色·賭技·풍기문란의 금지, 근검절약을 통한 스스로의 정화 그리고 사원간의 상호부조를 결의하였다. 이렇게 형평사는 창립시 우선의 당면목표를 계급타파·교육권장·사원 상호간의 친목에 둔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출발하였다.

 이것은 1920년대 전반기에 조직된 단체들의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인권의 자유평등, 상호부조, 친목 및 단결, 품성의 도야, 지식계발, 기술보급, 근면저축의 장려 등을 표방하는 실력양성론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적어도 형평사 취지문이나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주지나 사칙에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전혀 없었다고 하겠다. 이는 형평사 창립시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실력양성론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계열의 이데올로기가 형평운동에 일정한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사원자격을 백정만이 아닌 모든 조선인으로 하고 있는 점이다(社則 제4조). 이것은 창립과정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겠으나, 후에 운동방향과 조직상의 혼란을 초래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부유한 유산층 백정, 가난한 도부 노동자인 무산백정, 젊은 일반 선진 지식인들-은 각기 형평사에 참가한 동기와 목적이 달랐으며, 따라서 운동 전개과정에서 내부 분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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