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4. 형평운동
  • 3) 형평사의 분열과 그 극복
  • (1) 형평혁신동맹의 창립

(1) 형평혁신동맹의 창립

 1924년 2월 10·11일 양일에 진주 형평사 주최로 衡平社全朝鮮臨時總會가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는 진주에서 형평사가 창립된 후 각지에서 결성된 지방형평사(支社·分社)를 전국적으로 규합한 최초의 대회로서 그 의의가 컸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본사 이전문제를 둘러싸고 심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제2회 정기총회로 넘기기로 했으나, 본사의 서울 이전을 주장했던 張志弼·吳成煥(형평사 충남지사장)의 주도로 衡平社革新同盟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4월 25·26일 양일에 서울에서 형평사 창립 1주년기념식을 겸하여 형평사혁신동맹대회를 개최하여 衡平社革新同盟總本部을 정식으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날 대전에서는 진주의 형평사본부가 주최한 형평사 창립 1주년기념 전국형평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창립 후 겨우 일년만에 형평사는 분열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 분열은 단지 본사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대립에서 기인된 것은 아니었다. 분열되는 과정에서 표면화된 문제는 본사간부 불신임 문제나 본사이전 문제였지만, 혁신동맹은 창립하면서 슬로건으로 “일체 계획을 혁신하여 형평운동은 계급의식을 충분히 가진 철저한 분자만으로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형평운동은 백정계급 자신의 행동에 의해 절대적인 해방을 도모할 일” 등을 내걸었다.598)≪동아일보≫, 1924년 5월 23·24일.
≪조선일보≫, 1924년 5월 22일.
일본 유학의 경험을 가진 장지필 중심의 혁신동맹이 사회주의적 운동노선을 지향하려고 하는 반면에, 강상호 등의 본사측은 이에 반대하였다.

 즉 백정들의 인권해방을 위한 형평운동은 다른 계급운동과 긴밀히 결탁하여 계급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과, 총단결하여 인권해방운동에만 힘을 기울여야한다는 입장으로, 사회주의적 운동노선을 지향하는 입장과 개량주의적 입장의 강온 양론을 반양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 두개의 조류는 사상적으로 대립될 뿐만 아니라 경기·강원·전라도 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무산백정 중심의 세력들은 전자에, 경상도를 기반으로 하는 비백정 일반인 혹은 부유한 백정 중심의 세력들은 후자에 각각 속하여 지역적·계층적 대립의 양상을 나타냈다.

 각 지방마다 그 지방의 백정이 겪는 차별은 서로 달랐을 것이고 더욱이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일어난 변동은 지역에 따라 달랐으며 또한 그것은 지역적인 연대감을 강하게 하는 동시에 지역에 따라 차별에 반대하는 조직이나 전략이 적절한 형태로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진주본사의 지도자는 부유한 백정과 선진적인 일반 지식인들이었고, 이들은 백정의 불평등한 사회적 대우를 부각시키며 인권운동으로서의 형평운동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철폐와 지위향상을 위하여 사원들이나 그 자녀들의 교육과 계몽에 치중하였다. 반면에 경성의 혁신동맹의 지도자는 대부분 백정출신 지식인들이었다. 이들도 인권과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진주본사와 비슷한 입장이었으나 사원들의 생활문제에 대해서는 입장이 달랐다. 진주본사에서는 회사설립을 통하여 생활이 어려운 사원을 돕는다고 생각하였을 뿐 백정들의 전통산업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경성측은 사원들의 생활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여 그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예를 들면 혁신동맹창립총회에서는 피혁공장 설립을 계획하였다. 또 전국 조직을 활용하여 피혁제품의 공동판매제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며, 고기값 통제권한을 사원들이 획득하여 지역간의 가격 차이를 없애 이익감소를 줄이려고 하였고, 일본인 단체나 관청 관할인 도살장을 사원들이 직접 경영하도록 노력하였다. 경제문제에 있어서 경성측은 진주본사보다 분명히 진보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진주측은 온건, 경성측은 진보로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주측에서는 서울의 지도자들의 배후에 불순한 사회주의 집단이 있으며 그들이 형평운동의 분열을 조장한다고 의심하였다. 실제로 서울측은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우호적인 협력관계에 있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사회주의 경향이 농후하였다.

 주지하다시피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민족적 신생운동을 부르짖으며 실력을 양성하고 운동을 훈련하는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이들 단체들은 대부분 운동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교육과 학문을 들고 특히 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애국계몽운동의 맥락안에서 제기된 것이고, 이후 민족주의 계열의 실력양성론으로 이어졌다.

 1920년에 들어가면 서서히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분립운동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사회주의들과 일정한 측면에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급진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 사이의 분화도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 무렵부터 재래의 실력양성과 상호부조적 단체에 대신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무산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신단체들을 독자적으로 조직하였으며, 이와 아울러 재래의 단체들도 무산계급적 운동의 색채를 농후하게 띠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22년 하반기 또는 1923년 상반기, 지방에 따라서는 이보다 다소 늦은 1924년이나 혹은 그 이후를 경계로 하여 민중운동의 주류는 확실히 사회운동 방면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운동계의 이데올로기 변화과정이 그대로 형평사에도 반영되어 형평사혁신동맹의 분립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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