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4. 형평운동
  • 5) 형평사의 활동
  • (1) 차별철폐와 인권신장운동

(1) 차별철폐와 인권신장운동

 형평사의 일차적 목적은 전통사회에서 백정이 겪었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없애고 인간으로서의 똑같은 권리와 존엄성을 갖도록 하는 데 있었고, 따라서 형평운동은 백정해방과 인간평등을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였다.

 형평사가 창립된 후, 사원들은 일상적으로 당해 온 일반인에 의한 차별이나 굴욕적인 관습에 대항하게 되었고, 그러자 일반인과의 충돌은 더욱 빈번해지기도 하였다. 1923년 형평사가 창립된 이후부터 1935년까지 일반인과 형평사원 또는 백정과의 충돌 건수는 다음의<표 3>과 같다.

연도 1923 1924 1925 1926 1927 1928 1929 1930 1931 1932 1933 1934 1935 총계
건수 17 10 14 14 44 60 68 67 52 31 26 27 27 457

<표 3>1923∼1935년간 일반민과 형평사원 및 백정과의 충돌사건 수

*朝鮮總督府,≪最近における朝鮮治安狀況≫(1933·1935·1938년).

 이러한 형평사가 창립된 이후 일어난 수많은 충동사건은 오랜 기간 최하층 천민으로 굴욕적인 차별을 받으며 지내왔던 그들이 형평사의 창립과 더불어 신분적 해방과 평등을 지향하자, 이를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세력들과의 충돌·박해였다. 다음<표 4>를 보면 이러한 세력들이 대체적으로 양반·관공리·일반민(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경제적 이해 관계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차 별 내 용 건 수
자본가계급이 양반계급을 선동한 반동적 차별사건 28
관공리에 의한 차별사건 33
일반민에 의한 차별사건 24
아동에 대한 차별적 언어사건 10
차별에 대한 경제적 쟁의 15
110

<표 4>1923∼1927년 4월까지 총본부에 보고된 차별사건의 내용 분류

*平野小劒,<朝鮮衡平運動の槪觀>(關東水平社靑年聯盟,≪人類愛≫2, 1927), 221쪽.

 양반이나 관공리들은 기득권 계층으로 기존 사회질서의 변화에 반대하는 부류이다. 이들은 변화해가는 사회에의 적응을 거부하고 봉건적 의식체계를 지니고 있던 보수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백정들의 인권과 평등을 주장하는 형평운동에 대하여 분명히 반대하고 있었으며 반형평운동과 함께 진보적 사회운동단체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한편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는 충돌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형평사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것은 농민과 노동자라고 표현하고 있었다.609)≪조선일보≫, 1923년 8월 21일,<金海의 階級的 大衝突, 원인은 형평사를 반대하여, 농민 수천 명이 作黨>.
≪조선일보≫, 1925년 8월 14일,<수천 군중이 형평분사를 대거 습격, 노농회원의 폭동, 노동자 再擧 습격>.
徐廷禧,<형평사원 대 농민 충돌에 就하여>(≪新民≫5, 1925년 9월) 등 대부분의 많은 기사들이 농민과 노동자를 거론하였다.
형평운동 지도자의 한사람인 吳成煥은 형평사가 농민들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 또 형평사원들과 일반 농민들이 계급적 배경이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대립하거나 갈등을 빚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610) 吳成煥,<衡平運動의 敎訓:農民에 대한 惡感은 없다>(≪新民≫5, 1925년 9월호), 57∼58쪽. 그러나 형평사원들이 농민들에게 특별한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도 농민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반형평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는 사회 최하층 계급이었던 백정들이 신분해방과 평등을 주장하자 농민들은 이를 백정계급과 자신들의 동질화 내지는 자신들의 사회적 계급의 하향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이 형평운동에 대립적인 사회세력과 농민들이 상호연계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양반·관공리·농민들의 반형평운동은 대부분 형평사원에 대한 개별적 또는 집단적인 물리적 폭력의 형태와 수육비매동맹 결성과 같은 경제적 압박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폭력에 대해 형평사는 진상조사위원 혹은 특파원을 파견한다던가, 응원대나 결사대를 조직·파견하여 원조하였으며, 경고장 발송과 당국에 재발금지를 요구하기도 하고, 상해폭력죄로 고소를 제기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응하였다. 또 드믄 예이지만 屠夫들은 屠獸를 거부하는 동맹파업으로, 수육판매업 사원들은 영업중지의 방법 등으로 저항하였다.

 이렇게 형평사가 창립되어 그때까지 일상적으로 당해온 차별이나 편견에 집단적으로 저항하게 되었고, 일반인에게 형평의 의미를 선전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심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결의와 각오를 선포하고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지분사는 전국적으로 망라되었고, 전형평운동 기간 계속되었다. 토의안이나 결의안에 단지<차별문제에 관한 건>·<차별대우 반대에 관한 건>·<차별 철폐의 건>·<차별대우 적극적 철폐의 건>으로 그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지분사의 차별문제 대처 방안이나 실행 방법의 내용은 비슷했을 것이다.

 이러한 차별철폐 운동 가운데에는 호적에 백정이란 신분표시 삭제운동이나 관리에 의한 공적인 차별철폐 운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관공리의 사원에 대한 무례한 용어 변경을 각 관청에 교섭할 것”이라든가,<관공리의 형평사원 차별대우 철폐 건>등을 결의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부분적인 개선, 즉 공적 사회활동이나 자녀의 학교입학에 가해졌던 억압이 많이 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도 백정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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