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1) 청년운동의 발생배경
  • (1) 청년의 역사적 등장

(1) 청년의 역사적 등장

 우리말 가운데, 어린이-젊은이-어른에서 보듯이 사회계층의 하나로 ‘젊은이’란 개념이 있다. 근대 초기 최남선은 ‘소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때 소년은 20세 미만의 학생신분을 갖는 일단의 사회계층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용어는 어린이와도 통했다. 이보다 높은 연령층을 일컫는 말이 ‘젊은이’이다. ‘젊은이’는 일반적으로 18∼30세 전후의 연령층을 의미한다. 1920년대에 청년단체 가운데 ‘젊은이 모듬’이란 명칭을 사용한 경우가 있다. 이는 곧 ‘靑年會’를 순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靑年’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이다.621) ‘청년’은 영어의 ‘Young’, ‘Young Man’, ‘Youth’ 등에 해당한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발달단계 가운데 ‘Adolescence’ 곧 ‘靑年期’가 존재한다. 인간발달과정에 대한 이론은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청년기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고 아동에서 바로 성인이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청년에 대한 실질적인 의미의 연구는 근대 이후 로크와 루소를 지나 스탠리 홀(G. Stanley Hall)의 과학적인 태도와 방법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고 한다. 스탠리 홀은 청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a period of storm and stress)’로 표현한 바 있다(정옥분,≪청년발달의 이해≫, 학지사, 1988, 27∼36쪽). 우리말 고유의 표현인 ‘젊은이’가 ‘청년’으로 바뀐 것은 일본의 영향인 듯싶다. 일본에서는 우리 나라보다 빠른 1880년에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설립되었고, 1887년에는≪新日本之靑年≫(德富蘇峰)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청년’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의 보이스카우트(Boy Scouts)제도가 일본에 들어와 武士敎育과 결합되었으며, 점차 독일의 청년단체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면서 일본의 ‘靑年團’은 체계화되었다.622) 湯原元一,≪靑年團及其敎育≫(東京:目黑書店, 1917), 3∼12쪽. 일본에서는 ‘청년’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젊은이·청년의 뜻으로 ‘와카모노(若者)’란 고유 언어가 있다. ‘靑年團’과 같은 말로는 ‘와카모노 나카마(若者仲間)’가 사용되고 있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일본에서 출판된 청년 관련 서적으로는≪靑年期の硏究≫(죤·스탠리 홀 著, 同文館, 1910)·≪靑年夜學讀本≫(金港堂, 1911)·≪靑年思想論≫(朝報社, 1912)·≪靑年團及其敎育≫(岩田太郞, 1917)·≪靑年團の新紀元≫(大日本雄辯學會, 1922)·≪改訂靑年公民讀本≫(帝國地方行政官 朝鮮支部, 1923)·≪靑年と語る≫(同文館, 1926) 등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 ‘청년단체’를 처음 조직한 것은 일본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인 것으로 보인다. 尹致昊에 따르면, 1893년 10월 경 일본의 도쿄에 ‘조선청년애국회(The Patriotic Association Corean Youths)’란 청년단체가 있었다고 한다.623) 尹致昊,≪尹致昊日記≫, 1893년 10월 31일(주진오,≪19세기 후반 개화개혁론의 구조와 전개-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14쪽에서 재인용). 국내에서는 1890년대부터 미국인 선교사들이 YMCA 조직에 노력한 결과 1903년 YMCA의 전신인 ‘皇城基督敎靑年會’가 설립되었다. 이후 ‘청년’이란 말은 ‘인기 있는 유행어’가 되었고 각지에서 ‘청년’을 사용한 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上洞靑年學院(1904)·靑年學友會(1908)·大同靑年團을 비롯해 미주의 한인교회청년회, 재일조선인기독교청년회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624) 전택부,≪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정음사, 1978), 57∼60쪽.

 이때 ‘청년’은 학생 또는 30대 전후의 젊은지식인이 그 중심이었다. ‘청년’은 교육과 계몽의 대상인 동시에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상과 사회질서를 추구하면서 앞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끌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서 인식되었다. 또한 ‘구세대에 대한 혁신의 상징’이기도 했다. 20세기 전반기에 ‘청년문제’는 식민지 조선은 물론 세계가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는 ‘국민적 대문제의 중심점’이었다.625) 안 확,<3중위협과 자각>(≪아성≫1, 1921년 3월), 2쪽. 청년은 당시 식민지 조선이 처한 현실의 극복·대안세력으로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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