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1) 청년운동의 발생배경
  • (2) 청년단체의 출현

(2) 청년단체의 출현

 3·1운동은 불완전하나마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져왔고, 그 결과 각 부문의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조직되었다. 어느 계층보다도 사회사정에 민감한 청년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몰아친 세계개조사상에 고무되어 ‘조선 신문화 건설’을 내세울 중심기관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1910년대부터 많지는 않았지만 지방마다 종교청년단체는 물론 구락부 또는 수양회 형태의 일반 청년단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보통학교동창회가 있어서 그를 중심으로 청년들이 결합되어 있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을 비롯해 서울이나 기타 대도시의 중·고등학교에 취학한 학생도 많았다. 이들이 모두 청년단체의 주요한 인자였다.

 당시 조선의 현실이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으로 구분하기엔 조선총독부 자체가 학교시설로 청년들을 수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곤란으로 수양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청년회가 이러한 결함을 채워줄 사회적 수양기관이 되어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일본의 경우 이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과정에서 청년들의 역할에 대해 상당한 주목을 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 정부는 청년단체의 발흥에 주목하고 1905년 청년단체에 대해 연구·조사했다. 1915년에는 청년단체를 수양기관으로 규정하고 연령제한(20세)·설치구역(행정구역)·지도자 및 원조자·경비·활동내용 등 청년단체의 설치기준까지 마련했다. 즉 국가가 직접 청년단체를 지도하고 통제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세계적으로 사상조류의 변화가 일본에 밀어닥치자 일본 정부는 청년단체의 ‘자치적 경영’을 장려하고 독지가나 유력자들은 고문의 지위에서 청년단체를 지도하거나 원조하도록 했다. 연령문제는 25세까지 확대할 수 있도록 했으며 지방의 실정에 맞게 실시하도록 했다.626) 玉井廣平,≪靑年團の新紀元≫(大日本雄辯會, 1922), 19∼48쪽. 청년단체의 기원은 영국의 보이스카우트에서 찾을 수 있으나 일본의 청년단에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이었다. 특히 당시에 일본어로 ‘청년교양’으로 번역되었던 ‘유켄트플레게’는 일본의 청년단에 직접적인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청년교양은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시 독일은 조직의 형태가 단체 중심의 방침이었는데 일본은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청년단체를 조직하였다. 또한 당시 독일에서는 청년단체가 애국적이고 군사적으로 활용되었다(湯原元一, 앞의 책, 11∼12쪽).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본의 청년단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영국과 독일의 청년단체에 대한 내용도 소개되었다. 1919년 말∼1920년 초에 걸쳐 청년회·靑年俱樂部·청년수양회 등의 명칭을 가진 청년단체가 군·면·리에 급격히 출현하였다. 평안남도 지사에 따르면 1920년 3·4월 경부터 종교관련 청년회 및 일반 청년회가 곳곳에서 출현하더니 그해 말 청년단체의 수가 124개에 회원이 1만 3,088명에 달했다고 한다.627) 朝鮮總督府,≪道知事會議速記錄≫(1921년 4월), 44쪽(박찬승,≪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3, 234쪽에서 재인용).

 이처럼 청년단체가 급증할 수 있었던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1910년대 전국에 산재해 있던 비밀결사 형태의 반일 독립운동 경험과 3·1운동 당시 곳곳의 비밀 독립운동지도부 경험 등이다. 1919∼1920년 각 지역의 일부 청년단체들은 여전히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합법 또는 비합법의 형태로 관계하고 있었다. 평안남도 도지사의 말대로 1920년 말 현재 124개 청년단체 가운데 온건한 27개 단체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온한’ 단체로 많은 지도자들이 ‘위험인물이거나 전과자들’로서 잦은 강연회 등을 통해 ‘인심을 미혹’하고 있었다.628) 朝鮮總督府,≪道知事會議速記錄≫(1921년 4월), 44쪽(박찬승, 위의 책, 235쪽에서 재인용). 그러므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는 1920년 9월 도지사회의에서 각 지방에 속출하는 청년회들이 겉으로는 인격을 향상하고 체육을 장려한다고 하지만 조직행동은 ‘독립운동을 삼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629) 朝鮮總督府,≪施政に關する諭告·訓示竝演說≫(1919∼1922), 43쪽(박찬승, 위의 책, 234쪽에서 재인용).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장 吳祥根은<지방 청년단체 발전책>(≪동아일보≫, 1921년 2월 25일)이란 글에서 “재래로 당국자는 지방 청년단체를 일종의 독립단체로 간주하여 위험시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둘째는 1900년대 중반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계몽운동단체와 지방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한 청년지식인들의 실력양성운동 경험 등이다. 3·1운동이 실패하자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실력양성과 문화향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적으로 몰아친 개조운동과 문화운동 조류와 함께 하면서 그를 지도할 상설적 기관의 필요성이 청년회의 결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청년회는 일반에게 ‘지방문화의 중추기관’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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