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1) 청년운동의 발생배경
  • (3) 조선청년의 현실

(3) 조선청년의 현실

 청년은 일반적으로 계급·계층에 따라 노동청년·농민청년(농촌청년)·지식청년·학생청년·여성청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1920년대 당시 청년들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알아보자.

 청년노동자의 경우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강요받고,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일본인 노동자보다는 물론 조선인 성인노동자보다도 적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1922년 10월 현재 경기도의 경우 143개 공장의 노동자 1만 3,585명(남:10,677/여:2,908) 가운데 15∼30세에 해당하는 청년노동자의 구성비율이 58.5%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동시간은 炭酸水製粉業 1일 최장 11시간이었고, 정미업·製材·製綿·製絲 업종이 9∼10시간 30분, 제약업·솥제조업·燐寸製造業 등이 7∼8시간이었다고 한다.630)≪동아일보≫, 1922년 10월 21일.

 농민청년의 경우는 가정과 농촌의 봉건적 사회질서 속에서 자·소작 대부분의 주요 담당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봉건적인 악습 아래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아래서 경제적 독립이나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대부분의 청년들이 일제에게 교육의 기회를 빼앗기고 있었으며 위생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권리를 박탈당하고 정치적으로도 억압받는 처지에 있었다. 특히 학생청년은 한글을 모국어로 하지 못하고 학교 내에서 모욕과 압박을 받았으며, 일부 학업을 마친 학생들조차도 취직하지 못하고 과잉인구로 남는 것이 태반이었다.631) 金基鎭(すず生),<朝鮮靑年運動ノ當面任務>(金俊燁·金昌順 共編,≪韓國共産主義運動史≫ 資料Ⅱ,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9), 177∼181쪽.
朴應三(泰川),<청년운동은 왜 하는가>(≪黨聲≫27, 1933).

 당시 청년들 가운데 일부는 화투나 음주로 소일하거나 모르핀(morphine)에 중독되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생활의 빈곤과 직업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청년들도 많았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보여주는 지표 가운데 하나로 자살율을 볼 수 있다. 1924년의≪조선일보≫기사에 의하면, 조선인 자살자수는 1,487명(남:789/여:698)으로 주요 원인은 정신착란, 생활고통, 병에 따른 절망, 가정불화 등이었다. 이 가운데 30세 미만의 청년이 40%에 달했다. 이것은 당시 조선청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말해주는 것으로 특히 청년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또는 생활의 고통 속에서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병들고 마침내는 죽음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독서계를 통해 당시 청년들의 모습을 보자. 당시 조선청년들은 번역된 사상과 문예서적을 가장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사회주의 소설≪사선을 넘어≫는 어느 한 서점에서만 1만 부 가량이 팔렸다고 한다. 동시에 청년들은 화류계 창가와 같은 서적도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책은 1년에 4·5판을 발행할 정도였다고 한다.632)≪동아일보≫, 1921년 12월 27일. 청년들은 서구의 새로운 사상과 함께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병리현상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한 속에서도 청년들은 민족해방운동, 특히 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섰다. 1920년대 전 기간동안 각종 대중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된 사람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20∼30대의 청년들이었다. 특히 직업적 혁명가 또는 신문기자·학생·교사·관공리 및 회사원 등의 20대 지식청년들이 많았다. 조선공산당원 및 고려공산청년회원으로서 유죄로 확정된 297명 가운데 20∼30대의 청년이 61.2%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20대가 62.5%였다.633) 朝鮮總督府 警務局,≪朝鮮獨立思想運動の變遷≫(1931:고려서림, 1986), 66∼87쪽.

 일제 강점기 여러 정치·사회세력들은 청년에게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변화시킬 역사적 소명을 부여했다. 당시≪동아일보≫는 한 사설에서 “청년의 위대한 힘은 높은 이상, 웅장한 기상, 백절불굴의 용기, 義를 위해 생명과 재산을 草芥같이 보는 강렬한 정의감”에 있다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청년에게 “김가도 이가도 아닌 조선의 청년이자 救濟의 使徒”로서 순교자의 정신과 출전용사의 각오를 요구했다.634)≪동아일보≫, 1924년 3월 17일, 사설<청년 형제자매에게 고하노라-입학과 졸업기를 제하야>. 청년은 조선의 현실을 바꿔낼 가장 중요한 대안세력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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