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2)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초기 청년단체의 활동
  • (2) 초기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가. 초기 청년단체의 창립과정과 조직구성

 초기 청년회의 창립에는 지주와 상공인, 신문기자나 교사, 각 종교계지도자 등 지역사회에서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은 계층에 속하는 최고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그들은 초기 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들은 식민지 민족으로서 갖게 되는 고통과 불만 때문에 민족의 독립을 지지하였고,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지위는 기본적으로 노동자·농민의 희생에 의존한 것이었고, 이러한 계급적 한계는 격화되는 노동자·농민운동 과정에서 물러나거나 심지어는 적대적인 위치로 변화되었다.644) 이애숙,<1920년대 전남 광주지방의 청년운동>(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 편,≪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 1995), 238∼243쪽.

 다른 한편으로는 초기 청년단체들 가운데는 청년회의 고문으로 지주 및 조선총독부의 지방관리, 학교장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평안남도의 안주청년회는 군내 지주·상공업자·노동자·관공리 모두 청년회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경상북도 예천군의 예천청년회의 경우 예천군수와 경찰서장이 고문으로 있었으며, 경주청년회는 경주군수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창립되었다.645) 김일수,<1920년대 경북지역 청년운동>(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 편, 위의 책, 1995), 278쪽.

 초기 청년단체들은 지주·상공인·관청의 임원 등 지방 유지들의 금전이나 토지·가옥 등을 물질적 기반으로 하여 청년회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실은 청년회로 하여금 운영비나 주요 사업비를 청년 자신들의 회비로서 주체적으로 운영하지 못하고 지방 유지의 기부금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많은 돈을 기부한 유지는 간부가 되거나 청년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초기 청년단체들은 회장제를 채택하고 평의원을 두었으며, 고문제도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청년단체에는 서무부, 재무부, 교육부(지육부·덕육부·문예부·도서부·강연부), 체육부(운동부), 교풍부, 산업부(실업부) 등의 부서가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청년의 수양을 위해 신문·도서·잡지 등을 비치하고 열람케 하며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어 지식을 교환하는 활동을 담당하는 교육부(지육부·도서부·문예부)와 운동기구를 비치하고 운동회와 소풍 등을 통해 체육을 발달케 하고 기타 오락기구(음악도구·풍물 등) 등을 담당하는 체육부(운동부)가 가장 중심적 기구였다.

 1919년 말∼1920년 초부터 약 1년간 우후죽순처럼 설립된 청년단체는 1921년부터 활동이 주춤하기 시작했고 ‘수면상태’라고 표현될 만큼 부진한 상태에 빠졌다. 그 이유는 회비수납이 부진하고 유지들이 지원약속을 지키지 않아 운영이 곤란해진 면도 있지만, 중요한 문제는 청년운동에 대한 전망이나 확고한 자각과 의지가 결핍된 채 일시적인 시대사조에 끌리어 청년단체가 조직되었다는 데 있다.646) 장응진,<각지 청년단체에 대한 현대 명사의 요구>(≪개벽≫6, 1920년 12월), 26쪽.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지방기관, 즉 경찰서나 군청에서 청년단체를 지나치게 간섭하고 지도하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청년회에 대한 기대가 급속히 냉각되었다는 점도 있다.

 1920년대 전반기부터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金翰과 兪鎭熙는 청년단체가 ‘新人’ 청년 자신에 의해 지도되지 못하고 정치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자유롭지 못한 조선총독부의 간섭주의 정책 아래에서 청년단체에 기대한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지방 관청의 간부나 보통학교 교원 등이 단체의 지도기관을 이루고 ‘지도적 간섭과 장려적 강제’ 아래 있는 ‘官設團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청년단체는 무익한 존재로서 ‘무서운 해독의 원천’이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647) 김제관·유진희,<각지 청년단체에 대한 현대 명사의 요구>(≪개벽≫6, 1920년 12월), 36∼39쪽.

 초기 청년단체가 출현하던 때와는 달리 1921년부터 청년단체들은 가능한 한 관헌 및 학교의 접근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3·1운동 관련자와 외국이나 도시로 유학했던 학생들이 점차 청년회로 들어오거나 새로운 청년단체를 조직했다. 청년단체들은 1921∼1922년에 빈번히 있었던 조선청년회연합회·조선노동공제회·동경유학생학우회·조선고학생갈돕회·조선학생대회 등의 전국 순회강연, 서울 및 도시 유학생들의 방학을 이용한 강연, 각종의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청년단체의 혁신의 필요성을 느꼈다. 청년회연합회의 조직방침에 발맞추어 지방의 청년단체들은 단일지도체제인 회장제를 집단지도체제인 집행위원제로 변경하기 시작했고 평의원 또는 議事部가 폐지되었다. 일부 청년단체들은 郡내 모든 일반 청년들에게 개방하면서 연령을 15∼40세로 제한하고 40세 이상은 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했다.648)≪동아일보≫, 1920년 6월 15일.

 1922년에 들어와서는 기존의 청년단체 가운데 상당한 지역에서 지방 관리나 학교 관계자들이 지도하는 청년단체들은 쇠퇴했다. 지방 관공리들은 이제 독자적으로 자신들만의 수양단체를 만들어야 했다.649) 경상남도 진주의 관공리들이 중심이 되어 1923년 7월 2일 수양단 발회식을 가졌다(≪동아일보≫, 1923년 7월 10일). 일선융화를 지지하는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은 함께 독자적인 단체를 조직하고 생활개선과 지식교환 활동을 전개했다.650) 1923년 7월 10일 황해도 연백군 연안에서는 일선융화적인 단체 ‘10월회’가 조직되었다(≪동아일보≫, 1923년 7월 18일).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