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3) 조선청년총동맹과 청년운동의 조직적 진출
  • (3)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3) 청년단체의 주요 활동

 이 시기 기존의 청년단체들은 ‘혁신총회’의 형태를 통해 사회주의적 청년단체로 전환하거나 사회주의 이념 아래 새로운 청년단체가 결성되었다. ‘혁신’의 이유는 “회원 중심의 충실한 단체로 전환하여 민중해방과 신사회 건설에 청년운동이 사회적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존의 청년단체는 회장을 주축으로 한 간부 중심이어서 그 운영이 비민주적이며, 또한 장년층이 중심이어서 시대적 요구를 충실히 반영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혁신’의 내용은 회장제를 집행위원제로 바꾸어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통한 회원의 의사 반영 확대, 장년층을 배제하고 청년이 직접 청년회를 운영하기 위한 연령제한의 실시, 청년회원의 회비를 통한 재정운영으로써 지방유지의 영향력 이탈, 부서의 개편-집행위원과 검사위원을 두고 서무부·교양부·조사부를 설치- 등이었다. 혁신한 청년단체에서 도태된 사람들은 독자적인 사회단체를 만들었으며, 연령제한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준회원 제도를 두거나 노동자·농민운동으로 이전하였다.

 이처럼 지방 청년단체의 ‘혁신총회’는 청년운동에서 이념적 분화가 일반화되었고, 동시에 청년운동의 이념이 사회주의로 통일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사상의 통일화 과정은 군·부청년연맹 및 도연맹의 결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1924년 청총 결성 이후 지방의 청년단체들 가운데 사회주의사상을 연구하고 선전하는 경향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대구의 제4청년회는 마르크스의<공산당선언>을 연구하기 위한 정기강좌를 계획했다.684)≪시대일보≫, 1925년 1월 11일. 평북 신의주의 新灣靑年會는 문예부 사업으로 학술강좌를 개최하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마르크스 유물사관을 공부했다.685)≪동아일보≫, 1925년 11월 23일. 이와 같은 사회주의 학습은 일제 경찰에 의해 금지당하기 일쑤였지만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청년단체들은 각종 기념일을 이용해 청년대중에게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고 반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기념일에는 레닌사망 추도 기념일(1월 21일), 칼·로자 추도 기념일(1월 15일), 국제여성의 날(3월 8일), 파리콤뮨 기념(3월 18일), 메이데이 기념일(5월 1일), 국제청년의 날(9월 첫째 일요일), 러시아혁명기념일(11월 7일) 등이 있었다. 청년단체들은 기념일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기념 당일 오전에는 기념식을 거행하고 오후에는 가두행렬을 하면서 선전삐라를 살포하였으며 저녁에는 기념강연회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25년부터는 레닌주의에 대한 강연이 곳곳에서 열렸다. 강연의 주제는 레닌의 생애, 레닌과 레닌이즘, 레닌이즘과 마르크시즘, 레닌의 무산계급 독재정치, 레닌과 볼셰비키, 레닌이즘과 민족문제, 레닌과 약소민족운동 등이었다. 서울청년회는≪레닌과 레닌이즘≫이란 소책자를 발행할 계획을 세우는가 하면,686)≪시대일보≫, 1925년 1월 23일. 서울청년회는 레닌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레닌과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약력을 담은 기념사진 엽서도 발행하고자 했다. ‘레닌 탄생 56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26년 4월 23일을 ‘레닌학설 연구데이’로 정하고 4일 동안 레닌강좌를 갖고자 했다. 레닌강좌는 매일 밤 무산계급 독재정치의 의의, 레닌과 레닌이즘, 레닌과 볼셰비키 등의 주제를 가지고 개강할 예정이었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금지당했다.

 이 시기 청년단체들은 청년운동의 핵심인 ‘교양과 훈련’에 더욱 충실하고자 했다. 교양과 훈련의 내용은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청년을 양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청년단체들은 계급적 단결을 목표로 무산대중의 해방에 필요한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청년단체들은 회원의 교양을 위해 회보를 발행하였으며, 서울의 청년단체들은 간편한 신문 형태인 벽신문과 산신문을 정기적으로 발행하여 청년회관이나 지정한 곳의 벽에 걸어 회원은 물론 일반 대중들도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회원들로 연구반과 독서반을 만들었으며, 서울의 경성청년회의 경우 러시아어연구반을 만들어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687)≪동아일보≫, 1926년 2월 10일. 서울의 신흥청년동맹과 경성청년회는 기존의 교육기관에 대해 ‘부르주아교육기관’이라 비판하고 그를 부인함과 동시에 무산계급 청년이 교육할만한 교육강령을 따로 만들었다.688)≪동아일보≫, 1925년 9월 29일·1926년 2월 10일.

 이 시기 청년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반기독교운동의 전개이다.689) 반기독교운동에 대해서는 이준식,<일제침략기 기독교지식인의 대외인식과 반기독교운동>(≪역사와 현실≫10, 1993)을 참조. 반기독교 운동은 사회주의가 민족해방운동 이념으로 수용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1921년 5월 창립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각각 종교에 대한 사상투쟁을 강조했는데, 특히 이르쿠츠크파는 기독교를 구체적으로 지칭했다. 물론 그들은 종교도 민족해방운동의 일시적인 동맹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고, 그에 따라 반종교운동을 사상투쟁에 제한하였던 것이다.

 1922년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반기독교운동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종교운동과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반기독교운동의 이면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비판도 깔려 있었다.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에서는 반제국주의 측면을 가지고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인’하였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임시대회에서는 “종교를 원리상 부인하되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말고 청년들에게 계급의식을 고취해 청년운동의 근본적 정신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결정했다. 곧 청총은 종교를 계급운동의 완전한 적대세력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에 대해 사상투쟁을 벌인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1925년 4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토의사항 가운데 종교문제를 보면, 계급사회의 기독교 이데올로기적 기능(“현대종교의 본진인 기독교는 자본가적 제도 옹호의 제일선이다”)과 제국주의 시대의 기독교의 역할(‘침략의 梯隊’)을 비판하고 반종교운동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반기독교운동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선전·폭로·학교의 종교교육 반대’ 등 3가지를 제시했다. 이와 같이 1923년부터 1925년까지 국내의 사회주의 청년들은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라는 측면에서 원칙적인 반기독교운동을 천명하고, 반대운동은 대중운동 차원이 아니라 ‘선전’을 통한 사상투쟁 차원에 국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 4월 조공과 고려공청의 결성을 전후해서 더욱 고조되었다. 고려공청의 합법기관 역할을 하던 신흥청년동맹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란 차원에서 반종교운동의 첫번째 대상으로 기독교를 지목했다. 이후 지방의 청년단체들 사이에서 반기독교운동은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기독교세력과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빈발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비행사건과 관련해 반선교사운동이 고조되었다. 반기독교운동은 점차 반제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와 관련해 ‘제국주의의 침략도구 역할을 하는 기독교’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1925년 10월 한양청년연맹은 서울에서 이틀동안 반기독교대회와 반기독교강연회를 열려고 했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금지되었다. 반면에 주일학교대회는 예정대로 실시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일제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신흥청년동맹은 1925년 크리스마스를 반기독교의 날로 정하였으며, 지방의 청년단체들은 기독교의 반민중성·반민족성을 들어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925년 말 1926년 초에 정점을 이룬 반기독교운동은 민족통일전선론이 제기되면서 수면으로 가라앉았다. 조공 및 고려공청은 물론 각 공산주의그룹들은 종교계의 혁명분자를 망라한 민족운동세력과 협동전선을 주장하였다. 함북청년총연맹은 1926년 7월 집행위원회에서 “조선 민중의 최대 이익을 위해 종교·비종교의 구별을 불문하고 통일단결할 것”과 “사교는 박멸하되 기독교·불교·천도교의 이해와 연결을 촉진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기독교와 연대를 공식적으로 결정했다.690)≪시대일보≫, 1926년 7월 28일. 경성청년회연합회는 “조선의 종교청년단체는 구미의 종교청년단체와 같이 지배자의 대변자적 역할을 연출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보를 진하여 목전의 개량적 이익과도 타협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과 협동전선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건의문을 청총에 제출하기도 했다.691) 이 강, 앞의 글(하),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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