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5) 고려공산청년회와 사회주의 청년운동
  • (1)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출현

(1)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출현

 한국의 사회주의 청년운동은 국제공산청년동맹(킴 КИМ)과 국제공산당(코민테른 Коминтерн)의 영향 아래 발생, 성장하였다. 1921년 5월 상해와 이르쿠츠크에서 각각 고려공산당이 결성되었다. 1921년 8월 경에는 북경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이 결성되었다. 공청의 기반은 상해의 공청조직과 북경·연해주의 사회주의 청년이었다.

 국내에는 1919∼1920년에 걸쳐 ‘서울공산단체(1919. 10)’·‘조선공산당(1920. 3)’·‘마르크스주의 크루조크(1920. 5)’·‘사회혁명당(1920. 6. 상해파)’ 등의 사회주의 비밀단체가 출현하였다. 1922년에는 무산자동지회(1922. 1)와 신인동맹회(1922. 2)가 합동하여 서울에서 사회주의사상단체 무산자동맹회(1922. 3)를 결성했다. 일본 도쿄(東京)에서도 한인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사회혁명당(1921. 10. 서울파)’이 조직되었다.719) 1920년대 전반기 국내 각 공산주의 그룹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 참조.
임경석,<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형성>(≪역사와 현실≫ 28, 한국역사연구회, 1998) 참조.
박철하,<북풍파 공산주의 그룹의 형성>(같은 책).

 1922년에 들어와 사회주의 비밀단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조선공산당(김한그룹)’과 ‘사회혁명당(김사국그룹)’ 세력이 결합하여 중립당을 건설하였으며, 李括을 중심으로 한 ‘조선중앙공산당’이 출현했다. 1923년 초에는 김사국 그룹이 중심이 되어 고려공산동맹(1923. 2)을 결성했다. 이들 공산주의 비밀결사들은 한국에서 사회주의 청년운동이 출현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중심기관을 국내로 옮기려고 노력하던 고려공청 중앙총국은 1922년 8월 경 ‘조선공산당(중립당)’과 결합하여 새로운 중앙간부를 구성했다.720) 고려공청 중앙총국은 중심기관을 서울로 옮기려고 朴憲永(책임비서)·金丹冶(중앙위원) 등 공청 책임자들을 국내로 들여보냈으나 일제 경찰에게 검거되어 실패했다. 고려공청 중앙총국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 참조.
박철하,<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과 활동(1920∼1928)>(한국역사연구회 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연구반 편, 앞의 책).
―――, 앞의 글(1999).
이현주,≪국내 임시정부 수립운동과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1919∼1923)-서울파, 상해파를 중심으로-≫(인하대 박사학위논문, 1999).
중앙총국의 중요한 임무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완성과 함께 전조선을 대표할 ‘민족혁명적 청년단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1922년 가을 중립당 내에서 국내외 공산주의 그룹의 통일당 결성 문제를 놓고 김한 그룹과 김사국 그룹이 분열되었다. 이는 곧 고려공청 중앙총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사국 그룹은 중앙총국을 탈퇴하고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공산당 및 공청 기관을 만들었다. 고려공청 중앙총국은 무산계급 청년단체로 서울에 ‘무산자청년회(1922. 10)’를 조직했다.

 고려공청 중앙총국과 고려공산동맹은 서울청년회를 앞에 내세워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열고 무산계급 청년을 중심으로 한 민족혁명적 청년단체의 결성을 추진했다. 대회에서는 부르주아 문화를 배척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무산계급의 단결과 조직적 훈련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민족주의를 반대했으며 그동안의 민족적 투쟁을 계급투쟁으로 전환하고 종교를 부인할 것 등을 결의했다. 전조선청년당대회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청년운동이 무산계급 청년운동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24년 4월 서울파와 고려공청 중앙총국의 사회주의 청년들이 결합하여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념 아래 조선의 혁명적 청년단체가 조직된 것이다. 청총결성 이후 무산계급 청년단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새로이 조직된 청년단체 대부분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계급의식에 기초한 교양과 훈련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사회주의 청년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단체는 서울청년회와 신흥청년동맹·경성청년회·경성무산청년회였다. 이들 청년단체는 각 공산주의그룹, 즉 서울청년회는 고려공산동맹(서울파), 신흥청년동맹(1924. 2)은 고려공청 중앙총국(화요파), 경성청년회(1924. 12)는 까엔당(북풍파), 경성무산청년회는 스파르타쿠스당(조선노동당파) 등과 지도-피지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 네 단체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면서 지방의 선진적인 사회주의 청년들과 연대하여 지방의 청년운동을 사회주의적으로 이끌었다.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은 각각 기관지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청년회는≪청년조선≫, 신흥청년동맹은≪신흥청년≫, 경성청년회는≪청년의 聲≫을 기관지로 발행했다. 기관지 발행을 위해 출판사를 설치하고 편집부·사업부·선전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이들은 회보를 발행하였으며, 동시에 벽신문이나 산신문을 발행하여 회원 및 일반 대중이 청년운동 문제나 시사문제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이들은 레닌이나 칼·로자의 사망 기념일, 세계부인데이, 메이데이, 국제청년데이, 러시아혁명 기념일 등을 이용한 강연을 통해 청년대중에게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했다. 청년단체 내에는 러시아어 연구반·학술연구반 등을 설치하고 청년운동 이론은 물론 세계정세 인식, 국제혁명운동사, 레닌이즘 등을 공부했다. 여기에서는 기관지에 게재하려다 금지된 내용들도 같이 학습되었을 것이다. 지방의 무산계급 청년단체들도 학술강좌의 이름으로 한 곳에 모여 마르크스 유물사관,<공산당선언>등을 공부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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