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5) 고려공산청년회와 사회주의 청년운동
  • (2) 고려공산청년회의 결성과 조직 변화

(2) 고려공산청년회의 결성과 조직 변화

 고려공청 중앙총국은 ‘유일한’ 조선공산당이 없는 상태에서 공청 자체가 정치적인 운동에 많은 힘을 기울여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공청 지도자들의 경험 부족과 각 당그룹의 대립의 영향과 함께 공청사업을 어렵게 만들었다. 고려공청 중앙총국은 각 그룹을 통일하여 공청을 건설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특히 서울청년회 내 ‘정치가의 횡포’를 개혁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서울청년회에 대해 청년단체라기보다는 하나의 ‘政黨’으로 규정했다.721)<高麗共産靑年會第1次創立代表會>, РЦХИДНИ Ф.533 О.10 Д.1891.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그 다음날인 1925년 4월 18일 서울의 박헌영 집에서 고려공청창립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10개 道의 28개 세포단체 회의에서 선정된 대표 19명과 조공의 공청 파견대표 1명 등 20명이 참석했다. 참석한 대표들은 노동자(1명)·농민(1명)·여성(1명) 및 지식계급(17명)으로 모두 신흥청년동맹과 화요파에 속하는 30세 미만의 사회주의 청년이었다. 창립 직후 고려공청은 28개의 야체이카와 165명의 공청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지식계급이 95명이었고 노동자와 농민은 71명이었다.722) Представитель Ц.Б. Коркомсомоа(Тенътен-гван)(고려공청 중앙총국 대표 전정관),<Исполком КИМа, Доклад о деятельности Централного Бюро Коркомсомола(국제공청 집행위원회에 보내는 고려공청 중앙총국 활동보고)>, РЦХИДНИ Ф.495 О.135 Д.98 Л.144. 고려공청의 책임비서는 박헌영이 선출되었으며, 국제공청의 유일한 조선지부로 승인되었다.

 고려공청은 서울청년회와 조선노동당 등에 대한 분해작용을 통해 사회주의 청년들을 개별적으로 공청에 끌어들였다. 이를 위해 서울청년회와 조선노동당에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의 공청원들이 파견되었다. 하지만 서울파와 화요파의 대립은 지방의 청년운동까지도 분열로 이끌었으며, 고려공청도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고려공청은 공청조직의 확대와 사회주의 선전, 혁명적 민족단체와 협동전선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고려공청은 공청원의 회비만으로는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용의 상당 부분을 국제공청에게서 지원 받았다. 고려공청은 군연맹-도연맹-총동맹의 조직방침을 세우고 조선청년총동맹을 중앙집권적으로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고려공청이 지도하는 합법단체인 신흥청년동맹 내에는 활동가와 노동청년·학생청년 각각의 연구반을 설치하고 지도자를 양성했다. 사회주의 청년들은 연구반에서 사적유물론과 국제청년운동사 등을 공부했다.723)<Одеятелности Союза Новорожденной Молодежи(신흥청년동맹의 활동에 대하여)>, РЦХИДНИ Ф.495 О.135 Д.98 л.83∼84.

 고려공청은 창립 이후 일본 경찰에 의해 4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청 제1차 검거사건’ 이후 權五卨을 책임비서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재건하고 공청 지방기관도 복구하였다. 고려공청은 조선공산당과 함께 민족협동전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1926년 5월 고려공청 제2차 대회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일제 경찰망이 좁혀와 실패했다.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제2차 검거사건’이 터졌으며, 이로 인해 공청의 지방조직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고려공청 중앙은 盧相烈에 이어 高光洙를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고광수는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고려공청에 파견된 자로 이미 1926년 3월부터 고려공청과 합동을 적극 요구하던 李仁秀·金炳一 등 서울新派 중심의 공청그룹 및 梁明(북경의≪革命≫잡지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의 그룹) 등과 함께 ‘레닌주의 동맹’을 만들어냈다. 1926년 8월 고려공청과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공청그룹은 통합을 결의했다.724) 박철하, 앞의 글(1995), 133∼136쪽.

 고려공청은 1926년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 시기에 고려공청 중앙위원회를 열고 각 부서 및 각도 지방책임자를 선정했다. 공청원의 대부분은 서울신파의 지도를 받는 사회주의 청년들로 보충되었다. 이 시기 고려공청의 야체이카수는 국내-37(서울파 공청 20), 만주-42, 일본-2개 등 81개였으며, 공청원은 과거의 고려공청원으로 국내-162명(이 가운데 80명 체포), 만주-164명, 일본-7명과 서울파 공청원으로 국내-96명, 일본-4명 등 모두 443명이었다. 1927년 초까지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남도·함경북도·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북도·경상남도·강원도·충청남도·충청북도 등 11개의 고려공청 도기관을 건설했다.725) Делегата от Коркомсомола КИМ-ГАН(고려공청 대표 김강), В И.К.К.И. И И.К.К.И.М.(코민테른 및 킴에게), 1927년 2월 10일, РЦХИДНИ Ф.533 О.10 Д.1897 Л.4∼5. 이후 고려공청은 1928년 8월까지 양명-河弼源-金哲-金在明 등의 책임비서가 존재했는데 1928년 1∼2월의 조공 및 고려공청 제3차 검거사건과 1928년 8월을 전후한 제4차 검거사건으로 거의 모든 조직이 파괴되었다.

 고려공청은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12월테제>에 따라 해체되었고, 당 및 공청 재건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공청 재건운동은 각파 공산주의 그룹에 의해 분산적으로 진행되었다. 1930년 이후에는 즉각적으로 공청을 재건하기보다는 혁명적 농민조합과 노동조합 안에 청년부를 설치해 사회주의 청년들을 결집하는 데 노력했다.726) 신주백,<1929∼36년 공청재건운동의 전개 및 성격>(한국역사연구회 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 편, 앞의 책),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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