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6) 조선총독부의 청년단체에 대한 대책
  • (2) ‘중견청년’의 양성

(2) ‘중견청년’의 양성

 지방기관에서 중견청년을 양성하는 모습은 1920년대 전반기부터 나타나고 있다. 충청북도 학무과에서는 1923년 ‘사회의 중견인 일반청년을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中堅靑年修養團’을 조직하고 영동공립보통학교에서 9월 27일부터 10월 1일까지 1주일간 강연 및 실지운동을 실시했다. 대상자들은 영동·옥천·보은 3개군의 보통학교 졸업생 가운데 유망한 청년을 각 학교마다 약 10명씩을 선발, 모집하였으며 강연자는 충북지방 교화촉탁·학무과장·농업학교장·사범학교장·영동군수·영동경찰서장 등으로 학술·수양·체육 및 활동사진 등을 실시했다. 여기에는 각 보통학교장들이 참석하도록 했으며, 회원의 식비를 비롯한 일체 경비와 약간의 日當金까지 도청에서 지불하였다.755)≪동아일보≫, 1923년 9월 30일.

 1920년대 중∼후반에 들어와서 조선총독부와 지방기관들은 ‘중견청년’의 양성이란 이름으로 조선청년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거나 친일·어용화하는 데 적극 나섰다. 이러한 사업은 ‘농촌청년지도교육회’·‘중견청년강습회’·‘농촌청년강습회’ 형태로 대부분 농촌청년에 집중되었다. 그 실상은 황해도의 경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황해도는 도내 학교의 여름방학을 이용해 각 지역에서 ‘농촌청년강습회’를 실시했다. 도는 이것을 학교 중심의 사회교화사업으로 실시하였으며, 농촌지역의 ‘중견청년’을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756)≪동아일보≫, 1928년 8월 4일.

농촌청년강습회의 목적: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의 剛健한 정신을 함양하고 아울러 농촌에 堅要한 實業 지식을 보급함을 목적함.

개최지:해주군·연백군·송화군·안악군·신천군·황주군·재령군·평산군 등 8개소

기간:12일간

강습인원:30명

대상:18세 이상 25세 이하의 해당 지역 보통학교 졸업생

과목:修身과 농업

강습시간:학과와 실습 각 36시간 내외

강사:공립보통학교와 실업보습학교의 직원 및 郡의 技術員

(≪동아일보≫, 1927년 12월 18일).

 특히 강습받는 청년들에겐 하루에 1인당 40錢의 식비와 별도의 왕복여비를 보조함과 동시에 공동숙박을 하도록 하는 등 지방관청에서 직접 그에 필요한 경비를 제공했다.757)≪동아일보≫, 1927년 12월 18일. 함경북도에서도 일반 농촌청년의 강습을 위한 경비로 6,000원을 지원했다고 한다(≪중외일보≫, 1929년 9월 8일).

 뿐만 아니라 황해도의 각 군수들은 이에 적극 협조하며 농한기 때마다 군내 각 里에 ‘농촌청년지도교육회’를 설치했다. 이것은 각 리의 유력자 사랑방이나 교회·서당 등을 빌려 운영되었으며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그 마을의 유식한 청년이 지도교육하는 ‘아주 간편한 방식’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형태의 교육회가 신천군의 호월면 일대에 10여 개소나 설치되었다.758) 황해도 信川郡守 李承九는 면장회의 때마다 면장들에게 ‘농촌청년지도교육회’ 설치를 요구했으며, “무지한 농촌의 문맹군중을 속속 교양하는 것이 농촌개발과 산업진흥에 요소가 되는 동시에 급무”라고 주장해 왔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총독부는 지방기관을 통해 보통학교 교육을 받은 18∼25세의 청년들에게 ‘日鮮同化’에 기초한 ‘건전한 국민의 육성’을 위한 정신교육과 농업관련 기술을 교육하고 농촌지역의 개량과 산업진흥을 이끌어 갈 ‘중견청년’으로 양성함으로써 지방청년들을 체제 내로 끌어들였다.

<朴哲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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