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6. 학생운동
  • 1) 일제하 학생운동의 배경
  • (2) 일제하 한국학생운동의 성격

(2) 일제하 한국학생운동의 성격

 한국 근대에 있어서 학생운동은 개항과 더불어 신교육이 실시되고 학생계층이 형성됨에 따라 이들이 교육개화·교육입국·교육구국의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교내외를 통하여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전개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체로 개항에서 1910년 ‘한일합병’까지 개화·애국계몽운동기(1876∼1910)에는 協成會 등의 결사,≪매일신문≫등의 언론, 교내에서의 동맹휴학, 문화계몽운동과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회를 통하여 학생 자신들의 민족의식과 실력을 양성하고, 일반 국민들을 위한 민족의식의 고취, 문맹타파, 생활개선을 위한 집회·강연 등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762) 金鎬逸,<韓國近代開化·愛國啓蒙期의 學生運動에 대한 一考察>(≪人文學硏究≫ 14, 中央大 人文科學硏究所, 1987).

 1910년 일본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빼앗긴 다음에는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다방면에 걸쳐서 일제와 대항하기 위한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식민지시기의 학생운동은 대체로 일제통치정책의 변화와 짝하여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1910∼1919), 1920년대의 소위 문화정치기(1920∼1930), 1930년대 이후의 황국신민화통치기(1931∼1945)로 시대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일제하 항일학생운동의 체계화와 그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763) 金鎬逸,<1910年代 學生運動에 대한 考察>(≪又仁金龍德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1988).

 대체로 일제하 항일학생운동의 양상은 합법적인 결사, 문화계몽운동, 동맹휴학, 비밀결사, 가두시위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합법적인 단체의 결성은 당시 기성세대들의 결사운동에 짝하여 1920년대 전국적인 단체로서 1923년 朝鮮學生會와 1925년 朝鮮學生科學硏究會, 1927년 新幹會學生部가 등장하여 민족주의·사회주의·좌우협동전선을 펴면서 학생운동을 이끌어 갔다.764) 김호일,≪일제하 학생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81∼83쪽. 이들의 조직은 고립·분산적인 학생운동을 조직화, 통일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하겠다. 특히 1926년 6·10학생운동은 이들 단체의 힘이 작용한 것이다.

 동맹휴학이 본격적으로 사회화·여론화되고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그 성격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일제측 통계에 의하면 동맹휴학 회수가 1920∼1935년까지 866회나 되었다. 대체로 1926년 6·10학생운동 이전과 이후로 대별해서 본다면 전자가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항이었다면, 후자는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식민지 자체를 부정한 항일민족운동으로 승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 후 1930년대에 들어오면 동맹휴학은 비밀결사와 연계되어 전개된 특징을 엿볼 수 있다.765) 趙東杰,<韓國近代學生運動 組織의 性格變化>(≪韓國近代民族主義運動史硏究≫, 一潮閣, 1987).

 비밀결사는 항일학생운동의 중추적 기능으로 작용했다. 합법적인 단체활동으로는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제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 속에서 교내에서는 讀書會·班會를 조직, 소수정예부대를 양성하여 시위운동이나 동맹휴학에 앞장서게 하였다. 광주학생운동(11·3학생운동) 때의 醒進會, 1930년대 각급 학교의 독서회·반제반전동맹, 1940년대 黑白党·茶革党·無等會·조선독립당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었다.766) 鄭世鉉,≪抗日學生民族運動硏究≫(一志社, 1975), 506∼542쪽.

 가두시위의 형태로 학생운동이 전개된 것은 1919년 2·8학생운동에서부터이다. 비록 동경 시내로 진입하지는 못하였지만 분명히 가두시위를 통해서 그들의 의사를 표명하려고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국내에 있어서는 같은 해 3·1운동시 서울 탑골공원에서부터 시위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었으며 3·5학생운동은 학생들의 계획과 추진에 의하여 실행된 항일시위운동이었다.767) 金成植,≪日帝下 韓國學生獨立運動史≫(正音社, 1974), 121∼122쪽.

 1926년 6·10학생운동도 純宗의 인산일을 당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에 돌입한 실천운동이었고, 1929년 광주를 기점으로 한 광주학생운동은 항일학생운동의 꽃으로 광주시내에서 전개되었던 학생들의 울분이 전국의 都鄙를 막론하고 시위의 횃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9년 11월에서 다음해 1930년 1월 사이 전국적으로 참가교 194개교, 참가학생이 5만 4,000여 명이나 되었다. 또한 1940년 부산제2상고·동래중학생의 군사훈련 반대시위는 전시하 결전교육을 강요하던 시기에 일어났던 항일학생시위운동으로 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768) 金義煥,<日帝下 釜山의 學生抗日獨立運動>(≪尹炳奭敎授華甲記念 韓國近代史論叢≫, 1990).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학생들은 학교 안에서 식민지교육에 대한 저항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던 모든 전략과 전술을 동원하여 적이 일본제국주의라는 명확한 판단 아래 항일민족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고 그 중심에 위치하여 운동을 이끌어 갔던 것이 일제하 한국학생운동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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