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6. 학생운동
  • 2) 1920년대 이전의 학생운동
  • (1) 개화·애국계몽운동기의 학생운동

(1) 개화·애국계몽운동기의 학생운동

 1876년 개항한 조선왕조는 국내외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여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이어서 1894년 甲午改革을 통하여 교육의 기회균등과 학교교육의 제도화가 실현되고 學務衙門의 설치로 문교행정기구가 독립되면서 근대적 신학제의 수립을 보았다. 1895년 1월에는<洪範十四條>가 반포되어 그 11조에 “국중에 총명한 자제를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전습시킨다”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고, 이 해 2월 고종은 전국민에게 교육입국의 뜻을 밝힌<敎育詔書>를 반포하였다.769)≪官報≫, 開國 504년 2월 2일,<敎育詔書>.

 교육입국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교육에 대한 법제화 실현을 가능케 하여 1895년 4월<漢城師範學校官制>를 비롯하여 1904년 6월<農商工學校官制>에 이르기까지 제교육 관제·법령이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1895년 4월 한성사범학교가 서울 교동에 설립되었으며, 외국어학교로는 同文學(1883)·育英公園(1886)·日語學校(1891)·英語學校(1894)·法語學校(1895)·俄語學校(1896)·漢語學校(1897)·德語學校(1898)가 설립되었다. 소학교는 1895년 서울 중부 수하동에 수하동소학교를 개교한 뒤를 이어 장동(뒤에 매동)·정동·제동 소학교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동부학당 옛터에 양사동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와 함께 각 지방에도 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1896년 38개교였던 것이 1904년에는 서울에 10개교, 지방에 50개교의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중학교로서는 1900년 서울에 漢城中學校가 설립되었고, 1899년 京城醫學校·商工學校(1904년 농상공학교로 개칭), 1900년에 鑛務學校, 이밖에 1895년 法官養成所, 1897년 郵務學堂·電務學堂이 세워지기도 하였다.770) 渡邊學,≪朝鮮敎育史≫(講談社, 1975), 238쪽.

 1905년 제2차<韓日協約>(일명<乙巳保護條約>)으로 외교권을 일제에게 빼앗긴 대한제국은 그 뒤 1907년<韓日新協約>(일명<丁未七條約>)으로 행정권·사법권·인사권까지 빼앗기고 1910년<합방조약>으로 한국은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개화·애국계몽운동시기 한국민족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민족운동을 꾸준하게 전개하였다. 그 방법의 하나는 직접 무기를 들고 일제와 싸웠던 의병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실력을 양성하며 일제를 물리치겠다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독립사상(국권)과 민권사상을 기반으로 언론·결사·교육·산업 등 전 분야에 걸쳐 자강지술을 강구하여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건지려고 의식하고 국민들을 깨우치고 가르쳐서 투철한 국가관·민족관에 입각하여 구국대열에 나설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771) 愼鏞廈,<新民會의 創建과 그 國權回復運動>上·下, (≪韓國學報≫8·9, 1977).

 국권과 민권을 목표로 전개되었던 애국계몽운동은 그 실천방법으로서 교육의 진흥과 산업의 개발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사실 당시 애국계몽가들은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된 것은 일본과 같이 근대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각성 속에서 실력을 양성하여 일본을 구축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을 無知로부터 깨우쳐 근대 학문의 지식을 보급시키고 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교육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등의 구호 속에 전개되었던 교육구국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의 근간이었고 한민족 생존권의 절규였다.

 1896년 11월 30일 培材學堂 학생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학생단체인 협성회가 조직되었다.772) 尹聲烈,<남기고 싶은 이야기들-培材學堂>(35)(≪中央日報≫, 1977년 3월 16일). 이 협성회를 결성하는 데는 徐載弼의 도움이 있었다. 그는 1884년 甲申政變으로 미국에 망명, 그곳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체류하던 중 1895년 朴泳孝의 권유로 귀국,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국내에서 독립협회 창립,≪독립신문≫간행, 독립문 건립 등 활발한 민권·국권운동과 자주독립을 위한 개화운동을 추진하였다. 한편 그는 학생활동 지도에도 관심을 가져 장차 배재학당 학생들로 중추원 의관을 삼고 민주의회를 개설할 목적으로 자주 토론회를 열어 입헌정치에 대한 훈련을 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1896년 5월 21일 이래 매주 목요일 3시부터 2시간씩 특별 연속강의를 배재학당 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하고 세계지리·역사·정치뿐만 아니라 의회규칙·국내외 정세 등의 내용을 학생들에게 교육시켰다.

 서재필은 본격적인 토론회를 위하여 우선 13명의 학생을 모아 학생 모의국회와 같은 협성회를 발기시켰다. 이 때 창립 발기회원들은 梁弘黙·李承晩·申興雨·盧炳善·周相鎬·尹昌烈·閔贊鎬 등이었고 창립 당시 회칙, 사업계획, 회원명단, 임원진의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창립된 지 14개월 후에 발간된 기관지≪협성회회보≫에 의하면 그 설립목적과 창립 당시의 임원진을 알 수 있다.773)≪협성회회보≫1-1, 1898년 11월 1일,<론셜>.
설립목적:① 충군 애국지심의 함양, ② 상호간의 친목도모, ③ 학문연마와 선행 이행, ④ 민중계몽.
임원진 회장:양홍묵, 부회장 노병선, 서기 이승만·金淵根, 회계 윤창렬·金赫洙, 사찰 李益采·壬寅鎬, 사적 주상호.

 13명의 학생으로 출발한 협성회는 창립 1년 만인 1897년에는 회원수가 200명으로, 1898년에는 300여 명으로 증가되었다. 협성회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쳤지만 그 중에서도 토론회의 개최, 가두 연설회의 개최, 기관지 발행이 그 대표적인 활동이었다.

 서재필은 협성회를 조직한 후 그 운영의 제1차적인 방법으로 교내문제에서부터 정치·사회문제에 걸쳐 주제를 선정하여 토론을 통하여 해결방법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협성회의 토론회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배재학당에서 통상회로 개최하였으며 회원·찬성원 이외에 일반인의 방청도 허락하였고 특별한 의제가 있으면 특별회를 열기도 하였다.774) 김동면,<협성회연구-토론회 및 기관지 논설을 중심으로->(단국대 석사학위논문, 1980).

 협성회는 토론회와 함께 민중에게 자유민권사상과 자주국권사상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초청연사를 통한 강연회와 회원 스스로가 가두에 진출하여 강연회를 갖기도 하였다. 협성회의 초청연사로는 서재필·尹致昊가 인기 있었다. 서재필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서양사상을 심어주기도 하고 회의진행에 있어서 ‘동의’·‘제청’·‘개의’ 등의 방법을 가르쳤다. 윤치호도 ‘연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한국의 장래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협성회는 초빙강연회를 개최함과 동시에 1897년 여름부터 광화문·종로 등에서 민중계몽을 위한 가두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처음 대중들은 연설을 한다면 무슨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오인하였으나 차츰 호기심에 구경하기 위하여 모여들게 되었고, 연설내용 중 좋은 말과 새로운 용어를 발견하게 되고 사회개혁을 주장함에 따라 차츰 관심도가 높아지게 되었고 학생연사들도 차츰 정치문제를 주제로 삼는 연설회로 발전시켜 나갔다.775)尹聲烈,<남기고 싶은 이야기들-培材學堂>(36)(≪中央日報≫, 1977년 3월 17일).

 협성회의 활동 중 또 하나의 업적은 기관지의 발행이었다. 협성회 회원들은 토론회를 전개하면서 널리 일반시민들에게 토론의 내용과 결과를 알려주기 위한 필요성을 느끼고 회보간행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8년 1월 1일자로≪협성회회보≫제1권 제1호를 주간으로 간행하였다. 회보의 체제는 4·6배판 2단제로 1면에는<광고>를 싣고 2·3면에는<내보>와<외보>를, 4면 끝에<회중잡보>를 실었다.≪협성회회보≫는 1898년 1월 1일부터 4월 2일 제14호까지 주간으로 간행되었다가 9일≪일신문≫으로 제명을 바꾸어 일간지로 간행하였다.776)≪매일신보≫1-1, 1898년 4월 9일,<론셜>.

 이 시기 최초의 동맹휴학은 1896년 10월 배재학당에서 일어났다. 1895년 정부는 200명의 국비생을 이 학교에 위탁하였는데, 이들이 국가에서 지급되는 장학금의 액수와 지불이 늦어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단행한 것이다. 주동자 梁在弘은 수업을 받으러 교실에 앉아있던 동료들에게 “여보게들 무관학교로 가세 거기서는 학원대접을 잘한다네”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에 학생들도 동조하여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학부에서는 학생들에게 해명을 하고 지불약속도 하자 다시 등교하였지만, 몇몇 학생은 더 대우가 좋은 학교로 전학하였다.777)≪독립신문≫, 1896년 6월 4일,<잡보>.

 한편 같은 해 6월 새로 학부대신에 임명된 申箕善이 국왕에게 상소하여 단발, 양복착용이 야만의 시초요, 국문 사용의 금지를 요구하였는 데, 이에 대하여 한성사범학교 학생들이 학부에 청원서를 내고 모두 퇴학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 시기 학제문제로 일어난 동맹휴학은 1897년 교동고등소학교에서였다. 즉 이 학교에 학부가 수하동소학교생 12명을 전학시키자 고등소학교생들이 초등소학교생들과 같이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30여 명이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으나 이 학교 교사 李承喬의 무마로 해결되었다.778)≪독립신문≫, 1897년 1월 14일.

 또한 교사의 처우문제로 일어난 동맹휴학도 있었다. 1899년 아어학교 교사 미루코푸(Mirukoff)가 봉급을 영어학교 교사와 같은 수준으로 인상하여 줄 것을 요구하면서 학부에 항의하자 이에 동조하여 이 학교 33명의 학생 중 11명이 자진 퇴학하였으며, 같은 해 영어학교 교사 허치슨(Hutchison)이 임기가 만료되어 근무하기 어렵게 되자 학생들은 동교사의 유임을 학부에 요구하면서 들어주지 않으면 퇴학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학부에서는 청원서에 서명한 金永濟 등 12명을 출학시켰다. 이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단행하니 동교의 부교사 핼리팩스(T.W.Hallifax)의 노력으로 출학자 12명이 재입학됨으로써 해결을 보았다.779)≪독립신문≫, 1899년 1월 14·23일,<잡보>.

 한편 정치현실에 대한 문제와 일인교사 및 일본어 수업거부로 일어난 동맹휴학도 있었다. 1899년 영어학교 학생들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 참가를 제지하는 학교 당국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에 돌입하였으며, 1905년<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시내 소학교 300여 명의 학생이 고등소학교 학생과 함께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으며, 일어학교 학생들도 일본어교육을 거부하면서 동맹휴학하였다. 일본인 교사에 대한 불만으로 동맹휴학한 학교는 1906년 농상공학교생의 맹휴, 1907년 일어학교생의 맹휴, 1908년 법관양성소 학생의 맹휴가 두드러졌다.780)≪대한매일신보≫, 1908년 6월 3일.

 개화·애국계몽기에 있어서 학생들의 가장 활발한 활동은 체육행사였다. 당시 공·사립학교가 계속 설립되면서 교과과정에 체육교과목이 초등교육에서 사범교육,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설정되어 있었다. 더욱이 1896년<교육입국조서>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교육의 3대 목표도 체육·지육·덕육으로 체육을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은 건전한 정신을 갖기 위하여 건강한 육체의 단련이 급선무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 공사립을 막론하고 체육시간이 있었고 이 시간에는 엄격한 군대식 체조와 운동경기 특히 육상경기를 가장 많이 장려하였다.781) 羅絢成,≪韓國體育史≫(靑雲出版社, 1963), 98쪽.

 학교 내에서의 신체단련을 위한 체육활동은 학교단위의 운동회, 지역별 각급 학교의 연합운동회, 나아가 전국학생 대운동회가 자주 개최되어 학생들의 친선과 단결을 도모하는 데도 그 목적이 있었지만 한 걸음 나아가 일반민중들에게까지 단결과 민족적 자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특히 운동경기가 끝나고 학생·관중을 위한 계몽강연이 종종 열려 운동회는 육체와 정신의 조화 속에서 학생의 사기를 드높이게 하여 민족의 장래를 위한 애국심의 고취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각급 학교에서 개최했던 운동회의 성격은 1896년부터 1899년 사이에는 순수한 체육행사로 진행되었으나, 1905년<을사조약>늑결 이후에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인 교육구국운동의 차원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운동회가 체육행사로 끝나지 않고 강연회와 함께 개최되고 있었다는 것, 둘째 운동회가 군대식 훈련을 본땄다는 것, 셋째 운동회 때는 반드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와 운동가가 제창되었다는 것, 넷째 운동회가 학생들만이 아니라 그 지역주민과 일체감을 가지고 개최되었다는 것을 보아서도 그러하다.782) 金鎬逸, 앞의 글(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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