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6. 학생운동
  • 2) 1920년대 이전의 학생운동
  • (3) 3·1운동과 3·5학생운동

(3) 3·1운동과 3·5학생운동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정신으로 일본제국주의 통치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1919년 3·1운동은 집회수 1,452회, 참가인원 2,051,448명, 사망자 7,059명, 부상자 1만 5,850명, 체포당한 자 4만 6,306명, 파괴된 교회 47개소, 파괴된 학교 2개교, 파괴된 민가 715호라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786) 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서울新聞社, 1947), 96쪽. 그러나 이 운동은 민족독립을 위하여 전국 방방곡곡, 국내외 한민족이 거주하는 곳이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전 민족이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던 민족운동사상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계획과 추진은 대체로 3갈래의 계통에서 이루어졌다. 즉 천도교계통·기독교계통·학생계통이 그것이었다. 이들 계통은 무단통치 아래서도 유일하게 단체 결성과 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단체나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191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미국대통령 윌슨이 14개조의 처리방안을 제창했는바 그 중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국내에서는 고종의 국장일이 3월 3일로 정해져 어떤 형태로든지 독립운동을 일으켜야겠다는 민족적인 감정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학생계통은 1919년 1월 6일 경 기독교청년회 간사 朴熙道와 연희전문학교생 金元壁, 보성전문학교생 康基德, 경성의학전문학교생 韓偉健,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朱翼 등이 서울 관수동 중국음식점 大觀園에서 친목모임을 가졌는 데, 이 자리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다.787)金大商,<三·一運動과 學生層>(≪3·1運動 50周年記念論叢≫, 東亞日報社, 1969).

 학생들의 독립운동 거사계획이 진행되어 가고 있을 때 기독교계 운동 주동자의 한사람이었던 박희도가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으니 학생들은 독자적인 행동을 중지하고 기성 민족운동가들과 활동할 것을 제의하여 왔다. 이에 2월 20일 각 전문학교 대표들은 승동예배당에서 제1회 학생간부회의를 개최하여 첫째 金性得·金炯璣·金文珍·金大羽·강기덕·김원벽은 각자 학교대표로서 제반의 책임을 지고, 둘째 李容卨·한위건·尹滋英·韓昌植은 대표들이 체포될 때 그 다음 운동의 지도를 맡을 것을 결의했다. 이어서 박희도로부터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된다는 통보를 받은 김원벽은 25일 밤 각 학교의 대표들을 정동예배당에 모이게 하여 첫째 각 전문학교 및 중등학교 학생은 3월 1일 정오까지 탑골공원으로 집합하여 일대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다. 둘째 형편에 따라 전문학교생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시위운동도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788)岩瀨健三郞,<學生團事件豫審終結書>(≪朝鮮倂合十年史≫, 大東出版協會, 1921), 371∼394쪽. 이는 기성세대들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면서 별도로 학생들만의 시위운동을 감행한다고 한 것은 2·8학생운동에 자극을 받은 것에도 기인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성인들의 독립운동에 상당한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사일이 가까워오자 26일 김문진·이용설·윤자영 등 학생대표들은 정동예배당내 李弼柱 목사댁에 모여 학생들만의 독자적 시위는 3월 5일로 정하되 3월 1일의 시위에 적극 참가할 것, 제2차 3·5학생시위에서 체포를 면한 학생은 백절불굴의 의지로 최후까지 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민족지도자들에 의한 만세시위운동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어 崔南善이 기초한<독립선언서>가 2월 26일 경 인쇄됨에 따라 서울에서의 선언서 배부와 군중동원은 학생층에서 책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28일 오후부터 각 전문학교 대표들 손에 인수된<독립선언서>는 각급 학교생들에게 100∼200장씩 분배되고, 이와는 별도로 각 종교계와 연결된 학생들은 시내를 3개 지역으로 나누어 불교계 학생은 종로 이북, 기독교 학생들은 종로 이남, 천도교 학생들은 남대문 이외를 담당, 가가호호에 선언서를 배부했다.

 1919년 3월 1일 정오 각급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탑골공원에 모이기 시작하여 민족대표 33인을 기다렸으나 이들은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 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를 알지 못한 탑골공원의 시민과 학생들은<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한 다음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들 시위대는 2대로 나뉘어 1대는 종로1가→남대문역→서소문동→정동 미영사관 앞→대한문→광화문→조선헌병대 앞→프랑스영사관 앞→소공동→을지로를 거쳐 충무로2가까지 행진하였고, 다른 1대는 종로1가→무교동→대한문→정동 미영사관 앞→대한문으로 나와 2대로 갈라 행진하다가 충무로에서 해산당하였다.789) 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1(原書房, 1967), 308쪽.

 3월 1일 이후 삼엄한 일제 군경의 감시 속에서도 학생들의 ‘3·5학생운동’790)3·5학생운동이란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3·1운동의 범주에 속하나 한국근대학생독립운동에서 보면 2·8학생운동과 같이 학생계층이 계획하고 추진하여 행동화에 옮긴 항일독립운동이기 때문에 명명한 것이다.은 예정대로 추진되어 갔다. 4일 오전 한위건의 소집에 의하여 시내 각 전문학교 및 중등학교 대표자회의를 배재고보 기숙사에서 가졌다. 여기서 제2차 만세시위를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전 광장에서 감행할 것을 재차 확인하고 당일의 지도자로 강기덕·김원벽을 선출하였다. 이어서 이날 밤 강기덕·한위건·한창식·張基郁·金玉快 등은 별도로 모여 시위전개의 구체적 방법을 논의하였으며, 한편 金宗鉉(중동학교)·崔康潤(보성학교)·蔡順秉(국어보급학관) 등은 안국동 박해병 집에 동숙하면서 다음날 시위에 각자 태극기 지참을 강조하는<경고>라는 제목의 격문 400장을 등사하였다. 이들 3명은 종로지역의 각 동을 분담, 가가호호에 배부하였다.

 3월 5일 오전 9시 경 수천 명의 중등 이상 학생들이 남대문역 역전에 집결하였다. 이들 학생들이 남대문역전을 시위장소로 택한 이유는 3월 3일 因山을 보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군중이 많은 것을 감안하였기 때문이며, 평양방면의 학생들이 200명 이상으로 학생결사대를 조직하여 서울로 향하여 남대문역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의 시위계획은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다음 대오를 정돈하여 남대문→덕수궁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역전광장에 운집한 군중수가 수만 명791)이때 참가한 시위군중 수에는 각 문헌마다 차이가 있다. 즉<尹益善事件判決文>에는 ‘無慮數萬’, 총독부 보고에는 약 4,000∼5,000명, 조선군사령부 보고에는 약 1만으로 기록되어있다. 3·1운동 전기간을 통하여 1회 집회에 1만 명 이상이 한 장소에 모여 시위를 감행한 것은 3·5학생만세시위와 18일 강화도, 23일 경남 합천군 삼가(약 1만) 정도였다.에 이르자 학생들은 강기덕·김원벽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지참하고 있던 유인물을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붉은 머리띠로 머리를 동여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남대문 방면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총지휘자인 강기덕·김원벽은 예정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자 인력거를 타고 역전으로 달려가다가 시위대가 남대문을 향하여 돌진해오자 인력거를 돌려 시위행렬 선두가 되어 지휘하게 되었다. 시위행렬이 남대문을 지나려하자 일경의 강력한 저지로 많은 학생들이 구타당하고 체포되었으나 학생과 군중들은 일경의 저지선을 뚫고 두 갈래로 나뉘어 시가행진을 계속 감행했다.

 1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고 많은 학생이 부상당하고 수백 명이 체포당함에 따라 오전의 시위운동은 실패했지만, 이날 밤 11시 경 동경유학생과 시내 학생대표 63명이 송현동 62번지 李仁植의 집에 모여 사후수습과 앞으로의 시위전개방법을 숙의하던 중 일경의 급습으로 전원 체포되었다. 일제는 다음날 새벽 사건관계자 수색에 나서서 43명의 학생을 체포하고 많은 문건들을 압수하였다.792)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 朝鮮 2(みすず書房, 1967), 293쪽.
<獨立運動に關する件>(高第5885號), 大正 8年 3月 6日.

 이와 같이 ‘3·5학생운동’은 최대의 인원을 동원한 순수한 학생만으로 주도되고 실행에 옮겨졌던 민족독립만세운동으로 이날 이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지방학교와 학생들의 독립만세시위에 자극제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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